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리처드 브라우티건, 비채, 2015)
마지막 제재소 연못 옆에 노란색 트레일러가 나무 블록 위에 주차되어 있었다. 간선도로가 마치 천국처럼 멀어서 기도할 대상인 양 보이는 머나먼 곳에 선 트레일러는 다시는 어디로도 이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동묘지 같은 굴뚝에서 스멀거리는 죽은 연기를 토해내는 트레일러는 슬퍼 보였다. (중략) 작은 싱크대에는 안 씻은 접시들이 있었는데, 그 접시들은 원래부터 더러웠던 것처럼 보였으며, 씻어도 여전히 영원히 더러울 것 같았다.
(p.28~29, 1/3 1/3 1/3)
# 완벽했던 것들에 대한 추억
골드러시가 한창이었던 19세기 후반 캘리포니아는 성공과 꿈을 좇아 모여든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도시는 번창했고 사람들은 풍요로웠으며 영화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완벽할 것만 같았던 캘리포니아도 대공황과 전쟁 시기를 거치며 수많은 부침과 어지러운 변화를 겪었다. 물질적인 번영은 모습을 달리하며 꾸준히 캘리포니아를 잡아먹었지만 다른 중요한 무언가는 사라져 갔고 이를 붙잡으려는 막연한 노력도 빛이 바래져 갔다.
이 모음집은 그런 노력의 '되다 만' 그릇이다. 저자는 그것들을 추억한다. 캘리포니아가 완벽했던 것인지, 어떤 하루가 완벽했던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되다 만 꿈들, 그저 파편에 불과할지도 모를 글감을 뒤적이며 그는 손에 잡힐 신기루를 꿈꾼다. 또 한 번 완벽한 캘리포니아를 꿈꾼다.
라디오가 천천히 불타 사라지는 동안, 불꽃은 우리가 듣고 있던 노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인기순위 톱40 중 1위였던 노래는 13위로 떨어졌다. 9위에 있던 노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코러스 중에 27위로 떨어졌다. 노래들은 떨어지는 새처럼 인기순위에서 곤두박질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돌이키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p.39, 태평양에서 불탄 라디오)
#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체념, 아니 저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그의 투쟁은 뒤적이는 것 이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없다. 자신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조부모의 시대까지 뒤적여보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포기를 선언하지 않으려 애쓴다. 단순히 '돌아가자'고 호소하지 않는다. 과거에 존재하는 꿈이란, 굳이 오늘에 되살려 내일까지 끌고 가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저 '돌아감'이란 새로운 '나아감'을 위한 양분으로 쓰이는 게 최선이다. 박제된 과거를 자랑하듯 추억하기보다, 정작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곰곰이 씹어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미래를 위한 일이다. 체념에 대한 저항이다.
저자 브라우티건은 1984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운 곳에서 49세의 나이에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결국 미래에 닿지 못하고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의 글이 남긴 여운은 여전히 생명력 있게 '잃어버린 것들', '잃어버릴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든다. 그게 이 책이 가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