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는 아직도 나에겐 숙제다
3년간 프리랜서로 일해왔던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 시작은 실수라기엔 좀 큰 사건때문이다.
한순간 글을 쓴다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일했던 신문사는 일주일에 한 번 신문을 발행하는 주간지여서 많이 힘든 일은 없었다.
매일 마감이라는 압박감이 없었기 때문에 취재를 하고 며칠 미뤄뒀다가 밤샘 작업을 하기도 했다.
단지 규모가 작다 보니 신문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경영에 문제가 있어서 일반 출판일도 병행을 했다.
그중에 하나가 시에서 발행하는 시정소식지 특별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봄호, 여름호, 가을호 세 번 책자로 발행하는데 2016년 가을호 작업에서 사건이 터졌다.
내가 맡은 코너는 지역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취재하는 것이었다.
문어 하면 아! 그 집 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사장님을 만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역사를 들었다.
그것도 취재 두 번, 사진 한 번 총 세 번에 걸쳐 방문을 했다.
삶은 문어를 머리에 이고 장사했던 이야기, 영동선 개통으로 동해 바닷가에서 문어를 사 오는 중에
얽힌 이야기를 원고로 만들면서 재미있었다.
모든 것이 순탄했고, 원고도 좋다고 통과됐다.
발행되고 발송됐다.
발송된 다음날 출근을 했더니 사무실 분위기가 냉랭했다.
"이름을 잘못 쓰면 우야노"
'뭐지?'
그 순간 그 말이 내게 한 말이라는 건 직감했고 내가 이름을 잘못 썼다는 걸 알았다.'
잘 못쓸 이름이 뭐가 있다고?
그런데 세상에!
주인공 이름을 바꿔 적었다. 한 글자를 바꿔 적었다.
'이런 젠장'
만 이천 부를 발행했고 좀 더 비약하자면 온천지 다 뿌린 책자다.
거기에 오타가 조사, 동네 이름도 아니고 주인공 이름을 딴 사람 이름으로 썼다.
사고를 쳐도 토네이도급이었다.
아파트로 뿌려진 건 어쩔 수 없고 읍면동에 발송한 것 중에 주민들에게 돌리지 않은 책자를 다시 가지고 왔다.
한쪽에서는 프린트 라벨에 이름을 계속 출력해냈다.
사람 소개다 보니 다섯 번 정도 이름이 들어갔다.
글자 포인트도 다르고 글자가 작다 보니 일일이 칼로 다 잘라야 했다.
출력도 자르는 것도 모두가 큰일이었다.
그것을 책자에 다시 붙였다. 손이 부족해서 친구도 동생들도 불렀다.
먼 거리에 있는 면사무소에는 직접 가서 작업을 했다.
이름만 아니라면 넘어갔을 텐데 이름이라 문제가 된 것이다.
손이 덜덜 떨리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어디론가 딱 도망가고 싶었다.
교정을 나도 보고, 사무실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보았지만 아무도 그 유명한 분 이름이 잘못되었는지 몰랐다.
사실 그건 담당자의 기본이니까 말이다.
부끄러워서 며칠간 정말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내 실수를 같이 뒷수습하고 있는 신문사 식구들 볼 낯이 없었다.
국장님은 시청에도, 취재 당사자에게도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고 당사자에게는 몇 부 새로 인쇄해서 드린 걸로 안다.
그리고 두 달 후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내 적성에 딱 맞다고 생각한 일이 오타 하나로 주저앉아버렸다.
물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규모만 다르다 뿐이지 기사를 쓰다 보면 오타는 종종 나오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오타가 문제가 아니라 똑같은 일의 반복에 지쳤던가보다.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그만두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회가 오타 사건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미련 없이 그만두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이름이 드러난다는 게 두려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은 책임이라는 짐이 생기기 때문이다. 신문이 수요일 발송이 되면 목요일 오후부터 금요일까지는 개인적인 휴대폰이나 사무실 전화벨 소리가 무서워지기도 한다.
오타 때문이다. 교정을 볼 때 한 사람 보는 것이 아니다.
기본 네 사람이 돌려보는데도 못 찾아내는 것이 오타였다.
그 오타의 무게가 무거워 그렇게 나는 다시 경단녀가 됐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해 본 것도 별로 없고 게다가 이력서를 넣기엔 이미 나이는 무게를 가졌다.
한 달을 힐링하는 기분으로 지냈다.
청소도 하고 집도 꾸미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반찬도 가짓수가 많아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건 그만큼 느슨해지는 것이고 내가 가치가 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타 때문에 절필을 했는데 아니러니 하게도 나는 아직도 글을 쓰며 커피값을 벌고 있다.
그 일이 지금까지 했던 일이 밑받침이 되어서 무리 없이 해나가고 있다.
버거웠던 지난 시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큰 도움이 된다.
"배우서 남 주나"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배웠던 게 지금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자원이 된다.
오타 사건이 내겐 잊을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좀 더 세밀하게 원고를 보게 된다.
물론 나에게 오타는 끝나지 않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