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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Sep 02. 2021

뉘 집아들인지 참 잘 키웠네

유모차 끄는 노인과 청년

"o번 화면 좀 봐주세요~ 눈이 정화되네요"

혀를 차게 만들고 인상을 쓰게 하는 상황이 있는가 하면 감동을 주는 화면도 가끔 만난다.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들은 다른 요원들과 공유를 하기도 한다.

"매일 밤에 유모차 끌고 나오시는 유모차 할머니가 오늘은 멀리 가셨다가 길을 헤매셨나 보네요"

"옆에 청년 누구지?"

"지난번 경찰관들 순찰 돌다가 만나서 집 찾아 주던 그 어르신이네. 치매 있으시다 한 것 같은데"

자리를 한 달에 한 번 이동하기 때문에 다른 요원들도 지금 내가 앉은자리에 앉아서 관제를 했었다.

그래서 새벽이 되면 유모차를 끌고 나와서 골목을 걸으며 폐지 같은 걸 줍는 할머니를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밤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집에 안 들어가셨나 보다.

할머니가 밀고 가는 유모차에 한 손을 보태  같이 유모차를 밀고 언덕길을 올라가는 청년과 함께 등장했다.


유모차를  밀고 걷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와 키가 큰 청년의 모습은  대조가 되면서 더 눈이 갔다.

할머니가 뭐라 하시는지 걷다가 허리를 숙여 귀를 할머니께 가까이 대고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할머니를 만났는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할머니가 늘 모습을 보이는 학교 인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살짝 오르막이다 보니 청년이 유모차에 손을 올리고 같이 밀고 있었다.

"뉘 집 아들인지 참 잘 키웠네"

"요즘 제 갈길 가기 바쁜데 인성이 남다르네"

물론 유리는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지 처음 만난 사이인지 모른다.

하지만 몇 달을 지켜본 결과 요원들이 인지한 할머니는 

건강도 정신도 완벽하지는 않고, 혼자 살고 있고 새벽에 나와서 동네를 돌며 폐지를 주우신다.

가끔은 집 앞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한참을 이리저리 유모차 방향을 돌리는 모습을 본다.

순찰 돌던 경찰관이 집에 데려다주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들어가는 골목은 보이지만 어떤 집인지는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몇 개의 화면을 지나쳐서 20분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청년이 혼자 걷는 화면이 보인다.

할머니는 안 보인다.

잠시 CCTV 사각지대에 서 계신 것 같다.

그리고 곧 유모차와 할머니 모습이 화면에 나온다.

할머니가 늘 들어가고 나오는 골목 앞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 골목을 바라보다가 저 골목을 바라보다가 또 몇 분을 혼자 고민한다. 몇 자취 이쪽으로 몇 자취 저쪽으로... 그러다가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며 내가 보는 화면에서 사라졌다.

청년은 할머니와 헤어진 후 딱 한번 화면에 나오고 어느 화면에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CCTV가 없는 골목길로 갔던지 아니면 집이 근처일 것이다.


우리는 화면만 보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이 언제 어떻게 어디서 이루어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보폭이 느리고  허름한 할머니와 함께 보조를 맞춰 걸으며 

할머니가 안심할 수 있는 장소까지 동행한 청년의 모습은 

오늘 본 어떤 장면보다 보는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험한 장면을 보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나 심한 충격을 받기도 하지만 

가끔씩 만나는 따뜻한 장면을 보면서 그래도 세상은 살만 하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청년의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가정환경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뉘 집 자식이지 참 잘 키웠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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