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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Jul 29. 2023

토플 점수만 믿고 떠난 유학.

미국에 닿기 전엔 알 길이 없었다.

미국에서 근 20년을 지내며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미국 회사생활을 했다. 대기업 아트 디렉터, 중소기업 디자이너, 무명의 단편 영화감독의 편집조수까지 참 골고루 겪었다. 그 과정에서, 영어는 나에게 있어 잘하면 도움이 된다거나 가지고 있으면 폼이 나는 기술이 아니라 주로 생존의 수단이었다. 


갑자기 결정된 유학, 별 대책 없이 미국에 와보니, 한국에서 막연히 "배우면 다 하겠지", "나 정도면 뭐 잘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던 것과 현실 속의 영어는 전혀 딴 판이었던 것이다. 만사에 참으로 독하고 뾰족한 장애물이었다.   




뉴욕의 미대로 유학을 가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원서를 넣은 다음, 합격한 곳 중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1년 정도 포트폴리오를 준비하여 원서를 넣었고, 입학 전에 6개월에서 1년 정도 어학연수를 하는 것으로 언어 문제에 대비하곤 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그렇게 차근차근 준비해서 실행할 수가 없었다. 6개월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합격을 하면 뉴욕 유학길에 오를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다시는 없을 기회라는 - 모 아니면 도인 상황이었다.


당시 20대 초반의 나는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기엔 미숙했다. 유학을 준비하는 다른 아이들만큼의 여유가 없는 나의 조급한 상황이 억울하게 느껴졌고, 무엇보다도 당시 나는 한국에 있는 미술 대학에서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재능이 넘치는 선후배, 동기들과의 교류, 배움의 즐거움, 열정, 호기심, 낭만. 그 모든 걸 굳이 내려놓고 흔쾌히 떠나기엔, 동경의 땅 뉴욕은 너무 멀고 허구적이며 감히 귀찮았다. 그곳에 있는 내 모습이 더없이 궁금하고 두근거렸지만, 동시에 욕심 내보는 것조차 남의 옷을 입은 듯 어색하여 영원히 모르고 싶었다. 작은 우물 안 개구리라 해도 좋았다, 나는 나의 우물 안에 안주한 채 행복해질 길을 찾고 싶었다.  




대부분의 커다란 기회와 불확실한 도전이 그렇다. 이것이 과연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인지, 나의 목표는 무엇인지, 위험하진 않은지, 어떤 전략을 구상하여 실행해야 성공률이 가장 높은지, 이런 모든 것을 차분히 앉아 생각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종이에 아무도 몰라볼 망설임의 낙서나 끄적이며 게으름을 피우다 미련하게 모두 흘려보내기 십상이다. 


천성적인 게으름과 나태함에 비해 판단은 객관적이고 신속한 편이다. 거기다 천성을 거스르는 진취적인 결을 가졌다. 덕분에 하는 수 없이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통 큰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잦다. 6개월 안에 성공적으로 뉴욕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쏟아부어보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작정 설레고 기쁠 건 없었다. 멀리 볼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일단은 6개월. 6개월에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걸어보는 것이 나의 결단이자 계획이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이곳저곳 전전하며 유학원 상담을 시작했다. 미술 유학 포트폴리오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미술학원과 토플학원에 등록했다. 이미 한국에서 미대생이었기 때문에, 포트폴리오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 잘 모르는 걸 익혀야 하는 막막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까지 쌓은 학점을 이용하여 입학이 아닌 2학년 편입이 가능하다는 희소식도 들었다. 하지만 토플은 달랐기에 걱정이 많았다. 계속 학교에서 영어를 배워왔지만 실전을 염두에 두고 진지하게 공부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요즈음에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막상 시작해 보니, 토플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절대 영어를 잘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빠른 시일 내에 필요한 시험 점수를 달성하는 방법이었다. 씁쓸하지만 정확히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당시 멋모르고 공부만 하던 난 토플 시험 점수가 실제 영어 구사력을 가늠해 주는 지표가 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토플은 그렇게 인생 마지막 영어시험이 되었다.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했던, 부질없고 현실과 동떨어진 영어공부. 필요한 점수를 내기까지 세 번의 시험을 보았고, 6개월을 넘기지 않았다. 나는 영어를 곧잘 하는구나, 미국에 가도 언어는 별 걱정 없겠구나. 그렇게 믿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뉴욕에 있는 두 곳의 유명 미술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휴학계를 넣고 6개월이 막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두 군데 모두 편입자격을 인정받고 합격했다. 

이전 07화 "원어민 수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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