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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Aug 03. 2023

어째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야?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영어를 못했다.

'뉴욕 유학을 가면 고생은 하지만 성공에 더 가까워진다'라는 고루한 한 문장이 내가 아는 나의 미래의 전부였다. 멀리 본다는 개념을 이해하기엔 어렸던 20대 초입이었다. 내가 내린 결단, 나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미래에는 또 어떨지, 그런 것을 심도 있게 고민해 보는 경우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차 인생에 일어날 일을 스스로 예측해 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고 여겼다. 기껏해야 미성년자 때 어른들이 하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며 나의 생각인 척하는 게 전부였다. "~해야 돈을 많이 벌어.", "~해야 성공하는 거야." 따위의 비좁은 아무 말. 나에게 다른 가치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나의 삶과 자아를 납작하게 눌러 종이 한 장처럼 만들어 버리는 허무맹랑한 잔인함.  


돈과 성공을 위해 뭐든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자랐으니, 뉴욕 미대에 합격하고 유학을 확정 지은 것은 또 한 번의, 그리고 당시로서는 가장 크고 감격스러운 성취였다. 음주가무로 밤을 지새우면서 불투명한 미래를 회피하는 평범한 한국의 대학생이었던 나는, 하루아침에 전에 없이 훌륭한 학생, 장래가 유망한 예술인, 그리고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었다. 


한국에 두고 가야 하는 친구들과 가족들, 미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는 해맑은 무지함, 위태로운 영어 실력 - 이 모든 건  나의 비범한 유능함이 보장하는 눈부시게 밝은 미래, 한껏 부풀려진 허구의 그늘에 가려져 버린 것이다.   




"네 작업에 대해 설명해 봐, 제로." 


뉴욕 School of Visual Arts에 2학년으로 편입한 해, 광고 수업 교수님이 벽에 붙어 있는 내 과제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현대적이고 깔끔한 디자인의 오토바이를 좋아할 것 같은 비교적 젊은 교수님이었다. 지금이야 너무 흔해서 주변에 안 보이면 이상하지만, 그때만 해도 머리를 빡빡 깎은 젊고 건장한 백인 남성은 폭력집단과 연루된 무서운 인물일 것 같았다. 그분은 나를 적대하기는커녕 선생님으로서 최선을 다했었는데, 그것을 알아주기엔 나의 선입견의 벽이 너무 높았다.   


지금도 그렇다. 대하기가 불편한 사람에겐 유독 더 말을 잘 못한다. 영어로 하는 말이니 실제로도 못했지만, 광고 수업 때는 유독 그랬던 것 같다. 내 딴엔 열심히 설명하고는 '알아들었겠지' 하며 바라봤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감 넘치던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왜 내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조목조목 열심히 이야기했는데 못 알아듣는 거야? 내가 맘에 안 들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 


한국인들 대다수는 자신의 영어를 미국인이 알아듣지 못하면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하거나 주눅이 든다. 그걸 생각했을 때 나의 소위 근자감은 뿌리가 무척 튼튼했던 것 같다. 객관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인 척은 혼자 다 하던 나 역시,  더닝 크루거 효과를 피해 가지 못했다. 


'어째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야'라는 의아한 눈빛의 나를 보던 교수님은 교실에 있는 다른 한국 학생, A를 찾았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영어 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교수님은 나와 A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로, A에게 한국어로 지금 네가 한 말을 해 줄 수 있겠어? A, 너는 나에게 제로의 설명을 통역해 줘." 


나는 다시 한국어로 열심히 설명을 했고 A는 나의 말을 영어로 바꾸어 선생님에게 전했다. 내가 한국어로 설명을 시작했을 때에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아직 기억한다. 청산유수로, 멈추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활자를 차분하게 소리 내어 말하는 내 입에서 아무도 눈을 떼지 못했다. 시간을 멈춘 듯한 침묵이 강의실을 묵직하게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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