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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y 13. 2024

소극적 일상

소극적 일상 01


1.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여느 때처럼 MP3를 랜덤으로 재생한 출근길. 전주가 흐르자마자 "아!" 했다. 습도 높은 홍콩의 할리우드 거리를 거닐며 내내 들었던 노래다. 홍콩의 날씨를 상쇄하고도 남는 나른함에 차라리 몸을 맡기게 한 노래. 그러나 이후 여성 혐오적 가사를 썼다는 가수의 논란 때문에 더 이상 찾아 듣지 않게 된 노래.


새로이 좋아지는 것들은 많지 않은데 차마 좋아할 수 없는 것들은 늘어난다. 얽힌 추억들이 많아 완전히 놓아버릴 순 없지만 예전과 똑같이 대할 수 없는 것들이. 나이를 먹는 게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다는 노랫말처럼, 그렇게 좋아했던 것들과 멀어져 가는.


그러나 사실은. 오래오래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며 듣고 싶어요.

그러니 가수님들. 부디 잘 살아주세요, 제발.




2. 부서 이동



인사 발령이 났다. 전보. 같은 직급 안에서 다른 관직으로 보(補)하여 임명함.


중간에 프로젝트 팀이나 T/F로 차출된 적은 여럿 있었지만 하는 업무는 비슷비슷했으니 만 12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업무를 하는 부서로 이동한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타 부서로의 이동 제안이 있었고, 사교적이지 않고 외향적이지 않고 사실은 적극적이지 않은 걸 숨겨가며 일해 온 걸 이제는 그만해도 될 것 같아 길게 고민하지 않고 요청을 수락한 결과다.


담당하던 업무를 전달하는 동시에 외부 기관 담당자들에게도 인사이동 내용을 전달했다. "활달하신 분인데 정적인 곳에 가면 재미없지 않으시겠어요?" 하는 어느 분의 말에 속으로 조금 웃었다. 사교적이지 않고 외향적이지 않고 사실은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이 그간 잘도 감춰 왔구나, 하고. "그 재미없는 것도 한 번 경험해 볼게요."라 답했다. 마지막까지 진짜 모습을 숨겼다.


평소보다 한 시간 가까이 일찍 출근한 아침. 컴퓨터와 짐을 옮기고 빈 책상을 깨끗하게 닦은 뒤 기존 부서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미 한바탕 송별회를 진하게 치른 후라 '드디어 갑니다'라는 멋쩍음이 조금 담겼다. 새 자리로 짐 정리를 마쳤고, 새 부서의 업무 인수인계 일정표를 받아 들었다. 당분간은 엘리베이터 층을 습관처럼 잘못 누르는 일들이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현재에 적응할 것이라는 걸 안다.


내가 인사이동 제안을 받고 고민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선배와 마주 앉아 대화하던 어느 날. 나는 선배에게 아래와 같이 답했다.


"그동안 옷을 기우며 살았던 것 같아요. 구멍이 나면 바느질해서 메꾸고, 또 구멍이 나면 바느질해서 메꾸고. 그런데 옷감이 다 해져서 더 이상 기울 수 없는 상황이면, 옷을 바뀌 입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싶게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온 문장들. 마치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오듯 술술 대꾸를 하며 이게 내 진짜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운 옷 이란 세 글자를 입 밖에 내뱉고 난 뒤 알았다. 그간 힘들었던 게 맞았고, 그렇다면 환경을 바꿔봐도 된다고.  


5월은 옮긴 팀에서 새 업무를 익히고, 새 부서와 새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는 달. 잘해야 하는 일 말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회사 생활 챕터 2가 시작됐다.




3. 낮게 부는 바람


저녁 반주로 마신 소주 몇 잔 탓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주량껏 마시면 금세 곯아떨어져 버리는데 애매하게 마셨더니 이런다. 꼭 카페인이라도 들이부은 양 눈꺼풀은 무거운데 잠 손님이 올 생각을 안 한다. 하릴없이 핸드폰을 켜 특별한 목적 없이 여기저기 누르다 택배 어플을 클릭했다.


13:08:05 배송 예정인 상품을 인수하였습니다.

03:01:52 택배 상품이 이동 중입니다.


너무 햇반 위주로 식사를 하는 것 같아 적은 양이라도 따뜻하게 직접 밥을 해 먹어보려고 산 주물 냄비인데, 새벽 내 이동 중인가 보다. 차량 이동이 드문 새벽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어느 트럭의 이동을 생각한다. 이 시간 노동하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도.


평일 낮의 백화점이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며 다들 일 안 하고 돈만 써도 되는 삶이냐는 어느 커뮤니티의 글에 달린 댓글들을 봤다. 스케줄 근무하는 사람, 지방에서 날짜 잡고 올라온 사람, 연차 쓴 사람, 주말에 일하고 평일에 쉬는 사람, 그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사람 등등이 아니겠냐며 세상엔 9 to 6로 일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댓글이 수십 개 달려 있다.


세상에 열 명의 사람이 있으면 열 명의 인생이 있고, 그렇다면 나는 고박 10분의 1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는 80억 명을 돌파했다.  


개연성 있는 글이 편해서인지 문장의 운율에 좀 더 감각해야 하는 시는 평소에 자주 읽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이따금씩 시어가 주는 찌르르함이 필요할 때가 있어 좋은 시들을 모은 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을 추천받아 구입했다. 이게 시의 맛이지. 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감동을 넘어 질투가 이는 시구들과 문장들을 주워 삼키다 유혜빈의 <낮게 부는 바람>의 시에서 한참을 머물렀었다.


너의 소원대로 스르르

잠들 수 있게 되는 날에는


저 먼 곳에서

너는 잠깐 잊어버리고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한 사람이 너를 잠들게 하는 것이라는 걸

멀리서 너의 이마를 아주 오래 쓰다듬고 있다는 걸


아무래도 너는 모르는 게 좋겠지


내가 잠깐 잊어버린 새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에서 이 시간 노동하고 있는 사람과 내가 모르는 삶의 형태로 살고 있는 사람을 떠올리다 그 모든 각자의 의도하지 않은 다정함에 의해 살아가지는 거라 생각하다 지금쯤 내가 곤히 잠들 수 있게 바라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을까 생각하다 쩜쩜쩜.


이제 더는 안 되겠다.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눈을 감았다. 다음부터는 반주로 소주를 곁들지 않겠다 다짐하며, 마실 거면 차라리 마음껏 마셔버려야지 결심하며.




4. 대극적 일상


그간 브런치에 작성한 <어쩌면 보통날>, <제이 독립 일기> 매거진 글들을 모아 소장용 책을 만들었다. 어떤 표지를 만들지, 글씨 크기와 챕터를 어떻게 정할지 고민하는 순간은 역시나 즐겁다. 한 권의 책으로 묶으니 페이지 수만 약 310페이지. 쓸 때는 "이거 누가 읽는다고 이렇게 쓰나" 하지만, 역시 지나고 나면 "쓰길 잘했다" 하게 된다. 그걸 "누가 읽냐?"면 결국 미래의 "내가 읽으니까".


<어쩌면 보통날>은 소장용 책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새로운 매거진을 생성했다. 제목은 <소극적 일상>. 보통날보다 더 작은 이야기라도 남기겠다는 나름의 포부를 담았다(라기엔 큰 고민 없이 지었다). 역시 계속 쓰는 거다. 써야 한다.


별 거 없는 소극적(消極的) 일상도 써 놓고 나중에 읽으면 대(大)극적(劇的) 일상이 될 수 있다. 그걸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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