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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l 16. 2024

술을 따를 때 흘리는 술의 양만큼 취한 거라면

소극적 일상 02


1.


몇 년 전, 모 예능 프로그램에 세헤라자데의 현신 같은 이야기꾼 배우가 등장했다. 과장된 수사 하나 없이 말을 말 그대로 '재미있게 하는' 걸로 화제가 되었는데, 특히 엉뚱한 아내와의 에피소드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게 이따금씩 생각이 나 영상을 한 번씩 찾아보는데,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그 이야기꾼 배우 출연 모음 영상 조회수가 거의 천만 뷰에 달한다.


그중 기억나는 에피소드.


배우는 아내와 함께 어머니 산소에 가기 전, 술을 구입하기 위해 가까운 마트에 들렀다. 배우가 주차를 하는 사이 먼저 내려 마트를 향한 아내는 돌연 마트에 들어가지도 않고 다시 돌아왔다. 술을 팔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마트에서 술을 안 팔 리 없지 않느냐며 마트로 향한 배우. 확실히 마트 앞엔 '술을 판매하지 않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그 위에 '19세 미만에게는'도 함께.


저렇게 꽂히는 단어만 보이는 사람도 있지. 그래서 그동안 그 많은 에피소드가 만들어진 거였구나 하며, 봤던 에피소드에 매번 깔깔 웃던 나는 이제 없다.


7월 초 JLPT(일본어능력시험) N2시험을 약 한 달쯤 앞둔 시점. 두 권의 문제집을 끝낸 뒤 기출문제 풀이로 시험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주 출제되는 단어들은 이제 완전히 눈에 익어 한자 읽기 문제는 1, 2초 만에 거의 기계적으로 답을 찾는 정도가 되었는데, 채점을 하면 늘 완벽하게 푼 것에 비해 꼭 한 두 문제가 틀렸다.


3) そのかぜを治さないと外出できませんよ。(그 감기가 낫지 않으면 외출할 수 없어요)

낫다(治る)의 음독(音讀)은 나오루(なおる)니까 낫지 않다의 음독은 나오사나이(なおさない). 분명 1초 만에 풀고 넘어간 답인데 이걸 틀렸다고?


다시 보니 ④번의 나오사나이(なおさない)가 아니라 ②번의 타오사나이(たおさない)에 동그라미를 쳐 놨다. 꼭 이렇게 틀렸다. 전체 단어를 제대로 읽지 않고 눈에 보이는 한 두 글자에 꽂혀 답을 체크하고 넘어갔다. 여긴 역접의 의미니까 '그러나(しかし 시카시)'가 들어가야지 하면서 '게다가(しかも 시카모)'에 동그라미를 쳐놓는 거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스타일.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스타일. 그 배우의 아내만이 아니었다는 것.


몸에 배어버린 서두름. 1, 2초 더 빠르다고 1, 2초 더 빨리 행복해지는 건 아니니 1, 2초 더 시간을 들여 앞 뒤까지 꼼꼼히 읽자. 아는데 틀리는 것만큼 억울한 건 없으니.



2.


장마가 시작되자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의 자기주장이 심해졌다. 머리카락이 부풀어 올라 뒤에서 보면 삼각김밥 모양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내내 머리를 묶고 다니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다.


토요일 오픈 시간에 맞춰 이르게 도착한 단골 미용실. 건네받은 가운을 입고 의자에 앉았다. 담당 미용사가 다가오자 숙제를 안 해 온 학생의 마인드로 혼 날 준비를 마쳤다. 내돈내혼.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 미용실일 것이다.


염색과 매직을 한꺼번에 끝내버리고 싶었는데 여기서 더 머리가 상하면 돌이킬 수가 없다며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더 방문하기로 하고 오늘은 염색만 진행하기로 했다. 앞머리를 빗질하던 미용사가 갑자기 하늘로 쭈뼛 솟아오른 몇 가닥의 짧은 앞머리를 발견하곤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뿔싸. 며칠 전 출근 준비를 하다 갑자기 눈에 띈 흰머리를 뽑으려다 급하게 가위로 잘라버린 흔적이다. 이유를 묻는 듯한 미용사에게 "조카가 장난을 하다 잘라버렸어요"라 답했다. 그러자 "한창 그런 때 있죠? 저희 아이도 요즘 종이만 보면 그렇게 잘라요"란 답이 이어졌고, 이윽고 원하는 색을 고르는 단계로 넘어갔다.


"이모가 밖에서는 화장하는 게 좋은데 집에서는 화장 안 하는 게 좋아"라던 조카의 목소리가 스쳤다. 이렇게 사리 분별 확실한 어린이로 자란 조카인데 이모 머리카락이나 잘라버린 유아로 둔갑시켜 버리다니.  


잠깐의 부끄러움 모면하자고 조카 핑계 대는 이런 이모라서 정말 미안해.



3.


집 앞에 새로운 치킨 집이 생겼다. 며칠 전부터 오픈 일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 같더니 그 오픈 일이 오늘이었나 보다. 해가 질 무렵부터 떠들썩한 오픈 행사가 진행 중이다. 꽤 선선한 여름 저녁이라 에어컨을 켜는 대신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더니 그 떠들썩함이 기름진 치킨 냄새와 함께 거실로 넘어 들어왔다. 안내 멘트를 하는 직원과 줄을 서서 치킨을 주문하는 사람들과 시식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까지. 그들을 배경 삼아 익숙한 노래가 흐른다.


량현량하, SES, 터보, 신성우...


익숙한 노래 다음 또 익숙한 노래. 가사를 완벽히 외우고 있는 노래가 또 다음. 야구 중계를 보기 위해 틀어놓은 텔레비전의 음량을 조금 줄였다. 이다음은 또 어떤 노래가 나올까. 선곡의 기대감에 완벽히 동화되었다.


이 노래들이 익숙한 세대가 구매력이 있는 세대가 된 거겠지. 아이들이 아닌 치킨을 구입하는 부모를 대상으로 한 선곡이겠지. 내가 어느덧 그런 나이가 됐구나 하다가 그럼 내 위의 나이들이 듣는 노래는 어디에 있는 건가 했다.


유튜브 영상을 크게 틀고 노래를 듣는 엄마에게 눈총을 보내곤 했는데,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으면 엄마가 들을 노래가 지척에 없는 거였다. 언젠가 내가 듣는 노래도 그러겠지. 듣고 싶은 노래가 퍼지는 공간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며. 그렇게 전파와 거리에서 인터넷과 내 방으로 좁아들며.


노화 ; 질병이나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체 구조와 기능이 쇠퇴하는 현상.


오늘도 또 한 뼘 늙는구나. 숨이 있는 생물로 태어난 걸 어쩌겠냐마는, 내가 늙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4.


올해 프로야구 흥행 속도가 심상치 않은 듯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프로야구 관중 수 기록 기사와 프로야구 흥행 분석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그 흥행에 나도 일부 기여 중이다. 기회만 되면 직관 채비를 마치는 중이다.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야구 선수의 길을 걸었던 남동생이 있었던 만큼 가족 모두 야구에 진심인 편인 데다 요즘같이 고물가 시대에 1인당 만 원 선으로 몇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로 야구만 한 게 없어서다. 특히 돗자리를 펴고 넓게 앉을 수 있는 외야 좌석은 야푸(야구 푸드)를 펼쳐놓고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오늘도 퇴근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야구장. 야외 불펜장 근처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아놓은 동생과 조카를 만났다. 구입한 음식으로 배를 채운 다음 응원도구를 꺼냈다. 우리 가족이 응원하는 팀은 애석하게도 원정 팀. 대부분 홈 팀 응원 팬들이 있는 사이 일단 작은 몸짓으로 응원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경기 초부터 점수 차가 벌어졌다. 우리가 응원하는 원정 팀이 찬스를 잘 살려 점수를 차곡차곡 쌓은 와중, 홈 팀은 번번이 아쉬운 기회를 날렸다. 그렇게 2회가 지났을까. 다시 원정 팀이 공격을 시작하고 홈 팀이 수비 위치를 잡는 때에 갑자기 우리 뒤에서부터 어떤 아저씨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외야 철조망을 흔들며 외야 수비를 보는 홈 팀의 모 선수를 향해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당황한 사이, 본인은 후련해졌는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가, 또 얼마 있다 다시 나타나 같은 선수를 향해 야유를 퍼붓기를 몇 번 반복했다. 프로야구 출범 초기 관객들의 기상천외한 만행을 모아놓은 오래전 자료화면이 맨 눈앞에 상영되는 느낌이었다. 함께 온 지인들이 말렸는지, 아니면 점수 차가 더 벌어지자 화가 나 먼저 자리를 떴는지 알 수 없지만 경기 후반이 되면서부터는 그 아저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경기는 원정 팀의 대승으로 끝났다.


신화의 멤버 김동완이 팬들에게 말했다지. "신화는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라고. 그 아저씨한테도 그대로 전달해주고 싶다. "야구는 아저씨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라고. 만약 즐야(즐거운 야구관람)가 어렵다면, 적어도 시원하게 욕해도 괜찮은 집에서 보시는 걸 추천드린다고.



5.


술을 따를 때 술을 흘린다? 그렇다면 아무리 취하지 않았다고 우긴다 한들 취한 것임에 틀림없다. 술을 따르며 흘리는 술의 양이 취한 정도를 나타낸다. written by. 제이


탁자 위에 500원 동전 두 개만큼의 웅덩이가 생겨났다. 나는 또 이만큼 취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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