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복수적 가능성
「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질의응답(1)
Q : 제프 쿤스의 예술이 왜 아름답지 않은 건가요?
A : 첫째, 매끄러움이 가질 수 없는 ‘부정성’ 때문에 미학적이기 어렵습니다. 우선 매끄러움은 편안하고 안온하기에 쉽게 나와 동화됩니다. 자신의 주체적 만족과 바로 맞닿으며 기분 좋은 감정을 갖게 만들죠. 그러나 아름다움은 주체의 만족만 주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타자성이고, 부정성이기도 하기에 주체가 이해할 수 없고, 해석할 수도 없는 어떤 불가능을 품어야 하죠. 그렇기에 예술은 그것이 주는 긍정성과 함께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복수적 형태를 동시에 갖춰야 합니다. 따라서 단선적으로 이해되고 끝나고 마는 직선적 미학은 아름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 이해되어 버린 책처럼 계속해서 매력을 발생시킬 수 없을 테니까요.
둘째, 매끄러움에 고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물론 강독 시간에 언급했듯이 그것이 최초의 시도로써 전혀 다른 매끄러움을 대중에게 안겨주었다면 낯선 예술로 인정할 수 있죠. 그러나 어떤 미학적 형식이 완성되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완성의 순간 사라져 가야 하는 필연성을 갖기도 합니다. (아도르노의 문장, “불꽃놀이는 예술의 완전한 형태다. 완성의 순간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끄러움이라는 독창적 예술의 형태를 완성했다면, 그것에서 벗어나며 전혀 다른 무엇을 열어젖히는 가능성이 있어야 계속해서 아름다움일 수 있죠. 그러나 그의 작업의 과정이 단지 자본에 영합하며, 더 이상의 새로움이 보이지 않기에, 그것을 예술적이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셋째, 존재론적으로 읽는다면, 매끄러움은 나를 깨트리며 교란시키는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완고한 주체로서 평소 의식적 차원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환 시스템은 합리적 주체로서 소비적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죠. 이에 영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구원의 순간’은 그것 말고 전혀 다른 시간을 열어줍니다. 이곳과 전혀 다른 어떤 ‘바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죠. 관성적으로 살아가며 타자를 향해 닫혀 있는 주체에게 도착하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을 알아본 존재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균열되며, 눈물을 흘릴 때, 비로소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름다움을 경험한 이후에도 그의 직업과 삶의 방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러한 사건을 겪기 전과 전적으로 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살아가는 것, 일상의 무의미를 극복하고 온전히 나 자신이 된 것 같은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아름다움의 구원의 순간은 어쩌면 기존의 주체에게는 ‘재앙’과 같은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안온하게 살아가던 닫힌 주체를 위험하게 만들며 이전의 ‘나와 다른 존재가 되는 가능성’(랭보)을 완전히 열어준다는 것에서요. 따라서, 이러한 존재적 가능성을 열어줄 수 없는, 단지 좋아요 수준의 ‘매끄러움’은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면 ‘강도’의 문제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다른 텍스트와 함께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