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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는지 Jun 09. 2023

영앤리치가 아니라 어쩌면 다행이야  

치앙마이를 떠난지 반 년이 지났다. 마침 논문이 끝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치앙마이에서 하우스메이트였던 홍콩친구 에밀리가 일때문에 잠깐 방콕을 방문했고 오랜만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에밀리는 구독자가 600만이 넘는 피트니스 유튜버다. 그야말로 영앤리치. TV에서만 보이는 사람인줄 알았지 내 주변 인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명품브랜드 화장품 앰베서더로 활동하고 여기저기 광고가 들어오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돈이 들어오고 앞으로 돈 걱정 안 해도 되는 친구. 심지어 나랑 나이도 동갑이라 같이 있는 동안 현타가 오기를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치앙마이에 있는 동안 같은 집에 살고, 같이 놀고 먹고했던 친구라 특별히 대단해 보이진 않았는데 (물론 그러면서도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상에 사는 친구구나 생각했다) 이 날은 아, 그래 얘가 유명하긴 유명한 애구나, 했던 날이었다. 


당일날 자기 친구도 저녁에 초대해도 되냐고 묻길래 물론이지! 하고 셋이서 함께 저녁을 하기로 했는데 알고보니 그 친구도 태국에서 100만 구독자 가까이 보유한 유투버였고 방콕에서 함께 촬영을 하기위해 만난 사이었다. 놀랍게도 에밀리가 방콕에서 함께 촬영할 유투버를 찾고있다는 말에 미국에서 여행 중이었던 이 친구는 서둘러 태국으로 귀국했다. 치앙마이 사는 이 친구는 에밀리의 오랜 팬이기도 했고 함께 촬영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치앙마이에서부터 스탭들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방콕으로 날아왔고 딱 촬영만 2시간하고 곧바로 치앙마이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에밀리는 촬영 당일 2시간만 할애해 준게 미안했다며 그 날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저녁먹는 내내 에밀리를 만나보고 싶었다, 등등 팬미팅 현장이라도 된 것처럼 질문들이 쏟아지는데 나는 속으로 얘가 대단한 친구긴 했구나, 싶었다. 


반 년만에 만난 에밀리와 그간의 삶이 어땠는지 이야기 나누었다. 작년에 이 친구는 이 친구대로 나는 나대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던 지라 그 때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작년 겨울, 내가 방콕으로 돌아왔던 비슷한 시기에 에밀리도 홍콩으로 돌아갔고 내가 치앙마이에서 시간을 보내고 어느정도 안정을 찾았듯 인스타그램을 통해 근황을 보며 이 친구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에밀리는 홍콩으로 돌아가 더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한다. 치앙마이에 있는 동안 항상 사람들과 쉴새없이 어울리며 주의를 이리 저리 옮겨가며 회피했던 것들이 홍콩에 돌아갔을 때 한꺼번에 몰아서 닥쳐왔다고 했다.


작년에 에밀리는 이혼을 하고 치앙마이로 왔다. 연애포함 10년의 관계를 끝냈을 때 찾아올 타격이 어떨지 나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친구는 남편까지 유튜브에 같이 자주 등장했던 터라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등장하지 않자 이들 부부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동갑내기 여자애지만 결혼도 했고 일적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에밀리는 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앞서가고 있었기에 내게 많은 감정과 생각이 들게 했던 친구였다. 솔직히 이혼은 했어도 넌 이미 이룬게 많잖아.. 하는 못난 질투와 부러움도 있었고 가끔은 지금 이 친구가 안고 있는 고민에 비하면 마치 내 것은 별거 아닌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해서 왜 나는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들로 내 삶을 허비하고 있을까 하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이혼한 친구도 저렇게 멀쩡하게(?)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는데 나는 왜이렇게 찌질하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만 있고 싶어하는 걸까, 하며. 그런 친구가  홍콩에 있는 동안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 아무런 희망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몰랐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작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공감이 가서 안쓰러웠고 기분이 묘했다. 


이 친구를 보면 역시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약 1년의 시간동안 이 친구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혹은 정면돌파하기 위해 해왔던 크고 작은 새로운 시도들을 봐왔다. 거트로는 웃고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고될까 생각도 들었다. 결국 해결책은 내가 움직여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콩으로 돌아갔던 에밀리는 다시 곧 콜럼비아로 떠났고 오히려 그 곳에서 치유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홍콩에서의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데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지금은 훨씬 나아졌다고 했고 이제 다시 무언가 시작해 볼 용기가 난다고 말했다. 


두 명의 유튜버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 나는 왠지 모를 희망찬 기운에 휩싸였다. 막연하게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구나, 생각했는데 (어느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차이는 단 하나, '행동하냐 안 하냐'의 였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내가 다시 행동하고 싶게 만들었다. 더불어 내겐 묘한 안도감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삶의 허무함이 조금은 사그라 들었기 때문이다. 이날의 대화는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보다도 인간에게 더 중요한건 끝없이 추구해야할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확신이 더욱 선명해지게 만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쩌면 애초에 이루지 못 할 것을 추구해야하는 것 아닐까? 그러기에 꿈꾸는 사람들에게 시련은 필연이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편안함이 든다. 


이 날 저녁식사 후에 에밀리는 이틀 뒤 홍콩에 돌아가 본인의 이혼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당당함, 도전, 열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에밀리가 본인의 인스타그램과 유투브에 본인의 힘들었던 시간과 이혼과정에 대해 더이상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모습이 참 이 친구다운 선택이다, 싶었다. 그리고 이 친구는 다시 본인을 새롭게 일으켜세우는 과정을 컨텐츠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다 이 친구를 알게되어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저앉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저 앉았어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스스로 내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지켜본다는 건 내게 정말 많은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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