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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우 Feb 16. 2022

#8 요양

축령산 편백나무숲

 일단 공기 좋은 곳에서 한 달만 살아보기로 했다. 괜찮은 것 같으면 그 후에 몇 달 더 있을 계획이었다. 원래 시골 생활, 전원주택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장성으로 내려갔다. 데스크톱 PC, 읽을 책, 아령 등을 챙겼다. 이번 요양의 목적은 '건강 회복'이 전부였다. 다른 목적은 필요 없었다.


 펜션의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했다. 많은 암환자들이 와서 묵는다고들 했다. 1층에 넓은 숙소가 하나, 2층에 3개의 원룸 방이 있는 펜션이었다. 내 방은 그중에 가운데 방이었다. 처음 입실했을 때는 2층 안쪽 방에만 사람이 묵고 있었다. 중년의 아저씨였는데 특별히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첫날 짐을 풀고, 어머니와 함께 축령산에 올랐다. 편백나무 숲이 조성되어있고, 암환자 치유센터가 따로 있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운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산책길이 여러 코스로 잘 되어있었다. 대부분의 코스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는데, 그나마 정상까지 가는 코스가 가장 힘든 코스였다. 전문 산악인이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와 함께 축령산을 한 바퀴 훑었다. 어머니는 산악인들이 많이 애용하는 어플 '트랭글' 종합 순위 39위까지 올랐었고, 그때 당시에는 40위권이었다. 트랭글 이용자 수가 몇 십만 명이었기 때문에 그 순위는 실로 어마어마한 순위라고 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여러 번 등산을 해야 하고 그것을 몇십 년간 반복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순위였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시지만 산행을 꾸준히 한 덕에 어머니는 누구보다 건강하셨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나도 어렸을 때부터 아웃도어 생활을 좋아했다. 등산보다 캠핑을 더 좋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에 마음먹고 내려왔으니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매일 축령산을 오를 계획이었다.


 시골의 아침은 닭들의 울음소리부터 시작한다. 동이 완전 트기도 전부터 울기 시작했는데 그 데시벨이 아주 높았다. 펜션 옆에는 작은 개울이 흘러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항상 들려왔고, 거기에 각종 새 지저귀는 소리까지 끊임없이 들려왔다. 차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인공적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자연의 소리는 지겹지 않았다. 


 시골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공기였다. 서울의 자동차 매연과 미세먼지 가득한 도시의 공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 테라스에서 잠깐 앉아있으면서 피톤치드 가득한 공기를 마시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라면 정말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냉장고에 넣어둔 채식 위주의 반찬을 꺼내 잡곡밥과 함께 먹었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반찬을 리필해주기로 했다. 아점 비슷하게 첫끼를 해결하고 나면 점심 무렵이 되었다. 그때부터 산에 오를 준비를 하고 펜션을 나섰다. 매일 축령산 편백나무 숲을 다니면서 매일 다른 코스를 정복해 나갔다. 몇 주가 지나자 안 가본 코스가 없을 정도로 축령산 이곳저곳을 알게 되었다. 다리의 근육이 조금씩 붙는 느낌이었다.


 처음 입실했을 때 안쪽 방에 묵던 아저씨는 며칠 뒤에 떠났다. 어디가 아픈지 건강은 회복됐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못 했다. 아저씨가 떠나고 2층 바깥쪽 방에 새 손님이 입실했다. 등산하려고 외출할 때마다 그 방을 지나쳐야 했는데 얼핏 보이는 방 안쪽에는 삐쩍 마른 할아버지 환자가 산소마스크 비슷한 걸 끼고 누워있었고, 그 옆에는 보호자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그 환자는 의식이 없어 보였다.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말기 암환자의 모습이었다. 그 옆에 있는 여성은 아마도 딸일터였다.


 시골의 요양 생활이 처음에는 좋았다. 공기도 좋았고, 오랜만에 혼자서 보내는 시간들이 나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3주 정도 지나자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워낙 외진 곳이라 해가 지면 펜션 주변이 온통 어둠에 잠겨버렸다. 가로등도 없어서 어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매일 똑같은 일정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여자 친구가 보고 싶었다. 매일 통화를 하지만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주변이 시끄러워서 밖을 내다보니 앰뷸런스와 경찰차가 보였다. 뭐지 싶어 테라스로 나가보니 옆 방 할아버지가 심정지가 와서 앰뷸런스에 실린 상황이었다. 경찰이나 가족들이 서두르지 않는 걸 보니, 주무시다가 돌아가신 상황으로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곳에 묵고 있었지만, 옆 방은 상황이 달랐었다. 누가 봐도 회복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마도 병원에서는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했을 테고,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기 싫은 환자의 가족이 펜션을 잡은 거였다. 지나칠 때마다 보는 딸은 마치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 가족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 하지만 옆방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랬다. 그 할아버지가 마지막을 의식이 있는 상태로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암환자들이 최선을 다 한다는 명목 하에 죽기 직전까지 항암 치료를 한다. 그게 과연 맞는 방법일까?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이 쓴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에도 비슷한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국 같은 경우는 사망하기 6개월 전까지 항암치료를 하지만, 우리나라는 죽기 1개월 전까지도 항암 치료를 한다. 항암 치료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지면 그때서야 항암 치료를 중단하는데, 대부분 그때쯤이면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된다. 환자가 마지막을 정리할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갑상선암은 항암 치료가 따로 없다. 수술과 방사성 요오드 치료가 전부다. 항암 치료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웠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딱히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건 좋았다. 옆 방 할아버지는 어떤 병이었을까? 앰뷸런스가 옆 방 할아버지를 싣고 떠난 후 오후가 되자 딸이 와서 바로 짐을 뺐다. 아마도 한 달 단위로 숙박비를 결제했을 텐데, 2주 만에 짐을 빼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면서, 그 가족들도 이제는 좀 편안해지길 마음속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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