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갇힌 새카만 상자
나는 새카만 어둠에 대해 알고 있다.
그곳으로 가던 일곱 살의 겨울에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그곳이 가장 두려운 공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밤에 불을 끄고 나면 그곳은 전혀 다른 얼굴을 했으니까.
이불 밖으로 발을 꺼내지 않았다. 누군가 발목을 잘라갈 것만 같았다.
그 숱한 두려움의 까만 동공 속에서 나는 내 인생이 얼마나 길지에 대해 직감했다.
나는 지난할 정도로 복잡하고 지루한, 긴 과정을 거치며 살아갈 것이다.
기다림이라는 것, 사람을 만나고 신뢰를 쌓아가는 것,
완성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시작조차 두려운 것을 시작해야만 하는 것.
그 쥐똥 가득한 단칸방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세 들어 사는 집 가장 구석진 방으로 들어가며, 늘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맘껏 노래하고 싶었다. 큰 소리로 비디오를 보고 싶었다.
방충망 한 구석이 미어진 그 단칸방은 나에게 그랬다.
요즘의 나는 겁에 질려있던 어린아이에 비하면 나아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영혼의 일부는 여전히 그 방 한구석에 숨 쉬고 있다.
어둠의 시선에 얼음이 되어 눈치를 살피는 아이가 처량하게 이 맘 한 구석에 숨 쉬고 있다.
다행이다.
그걸 잃어버리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내 두려움의 정체가 진정 그것인지도 모른다.
10대 때부터 오랜 기간, 블로그는 나의 대나무숲이었다. 우울함을 타고 났던 나는, 사람들이 놀랄까봐 일상에서 차마 밖으로 표출하지 못했던 감정을 블로그에 털어놓곤 했다. 일종의 ‘우울 휴지통’이었던 셈이다. 당연하게도 글들은 잘 정돈되어 있지 않다. 태풍이 지나간 후의 폐허처럼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쓸고 간 후 바닥에 버려진 단어의 조각들이 이리저리 어질러져 있을 뿐이다. 그 중에 위 글은 ‘새카만’이라는 제목으로 2015년 11월 30일에 올라와 있었다. 당시 내 나이 25세, 어쩌면 내 마음의 맥을 짚어 제법 정갈한 단어들로 정리한 첫 글인 듯 하다. 그 흔한 제 ‘마음의 맥’을 집기까지 25년이 걸렸다는 뜻일 것이다.
그 전까지 내가 쓴 글들은 모두 감정의 해소에 지나지 않았다. 에세이라고도, 시라고도, 심지어 일기라고도 할 수 없었다. 작은 조각글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러나 ’새카만‘이라는 글은 내 마음의 ‘계보‘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내가 갇힌 작은 상자에서 시작되는 개인의 역사를 말이다.
2019년, 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빈부격차를 뼈 아픈 묘사와 블랙코미디로 버무린 작품이다. '기생충'은 영화에서 가난을 적극적으로 벗어나기 보다는 타인이 지닌 ’부‘에 의탁하려고 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노골적일 정도로, 가난한 인간을 흡사 '바퀴벌레'처럼 묘사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의 그 울렁임이란. 소름 끼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에, 하루종일 기분을 망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날 나는 '가난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물질적 가난에서 상당 부분 벗어났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 그래서 나는 ‘가난하다는 감각,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영화 <기생충>에서 '그 안'에 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어느 마음 넒은 부자가 나타나 나를 구제해주지 않을까 라는 은근한 욕망까지 모두 까발려진 기분. 영화 속 인물들을 보며 동족을 만난 반가움을 느꼈을 정도로 내 모습을 빼다 박았다.
내 나이 한 살에 엄마는 첫 번째 이혼을 했다. 일곱 살에는 두 번째 이혼을 했고, 나는 성이 다른 동생을 품에 안고 외할머니댁 옆 집 작은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아이의 양육권을 사수하기 위해 모든 재산 분할과 양육비까비 포기했던 엄마는 ‘여자 혼자의 몸으로 온갖 고생을 하며 우리를 키웠’다. 돌이켜보면 행복한 기억도 많다. 엄마는 아주 희생적인 부모였고 부지런 했으며,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가난이란 것은, 아주 작은 가난일지라도 사람을 궁지에 빠트리기에 충분하다. 가난은 엄마와 아이를 떨어트려놓고, 아이의 순수한 마음 안에 걱정과 불안을 심어 놓는다.
이혼은 또 어떤가. 이혼은 정상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들에게 외로움과 배척감을 가르친다. 한 쪽 부모와 완전한 단절을 겪어야 했던 나는 나머지 한 쪽 마저 언제 나를 버릴지 모른다는 공포를 겪었다. 그 ‘한 쪽 부모’가 만든 구멍이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는다는 건, 그 자체로 억울함이다. 부모와 세상에 대한 애착은 제대로 형성될 틈이 없었고, 반대로 결핍은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을 꼬아버렸다.
내 마음 안에는 작은 상자가 하나 있다. 그 상자의 원형은 내 나이 일곱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세 식구가 함께 살았던 작은 단칸방이다. 그곳은 나의 보금자리이자, 숨을 곳이자, 감옥이었다. 열다섯에 이사를 나오며 몸은 벗어났지만 마음만은 거기에 남아 그 방과 하나가 되었다. 내 마음은 방과 함께 작아지고 작아져서 손바닥만한 상자가 되었다. 한 개, 혹은 그 이상의 인생을 옥죄고 가두는 지독한 외로움과 억울함. 그늘진 감정들로 겹겹히 포장된 상자의 표면은 단단해졌다. 고집과 아집이 되었다. 그 안에 들어앉은 나에게 아무도 괜찮다고, 다 좋아질 거라고, 그만 나오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삶은 견디는 것이라 했다. 다 견디어진 삶들은 어디로 갈까,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강가에 둥둥 떠내려오는 상자들을 보았다.
’너만 힘든 게 아니야.‘
그런 말을 툭툭 쏘아올리는 작은 상자들. 그러나 그런 동질감도 별 위로는 되지 않았다.
질문을 잃은 자에게 남은 인생은 ’순응‘일 뿐이다. 펼쳐보지 못한 인생은, 그 작디 작은 상자에 다 담기고도 남았다.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외로운 아이는 들어주는 이 없는 수다쟁이가 됐다. 나는 내게 말을 걸어주는 방식으로 글을 택했다. 상자를 감싸는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며 이름을 붙여주듯이. 불안, 초조, 공포, 중독, 몰이해, 서운함, 강박, 편견, 자기 파괴… 그 말들을 나의 인생으로 재정의한 것이 이렇게 글이 되었다. 나를 이해하는 단어들은 여전히 발견되고 해체되며, 다시 정의되고 있다.
아직도 당신에게 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들릴지 두려운 마음이 있다. 그러나 가난하다는, 부족하다는, 더 애써야한다는, 모든 형태의 상자에 담긴 작은 인생들을 위해 용기내에 꺼내놓는다. 삶이 나아지려고 할 때마다 발목을 잡아대는 ‘가난감’에 묶인 이들에게 그만 나와도 된다고, 다 나아질 거라고, 괜찮다고 노크하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나는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2024. 10. 01 나의 방에서, 이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