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녀 프로젝트
본내가 엄마를 진심으로 미워하기 시작한지 4년이 지나고 있다. 가끔은 내가 불효자가 된 게 당황스럽다. 착한 아이 컴플렉스의 교과서 같았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유명한 마마걸이었다.
“어휴, 이 집 딸은 엄마 껌딱지네? 우리 애는 중학교 들어간 후로 지 엄마 거들떠도 안 보던데.”
친구처럼 붙어다니는 모녀의 모습이 보기 좋다며 칭찬하던 단골 가게 사장님들의 말. 그런 말을 들은 엄마의 미소는 방금 피어난 꽃처럼 예뻤다. 나는 엄마의 그 표정을 참 좋아했다. ‘친구 같은 모녀사이’ 그건 엄마의 자부심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더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종종거리며 따라다녔던 애끓는 시간들을.
결혼은 물론 재혼까지 실패한 후, 엄마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사람 같았다. 편하게 커피 한잔 마실 친구조차 없는 그에게 나는 딸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남편이자,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두 번째 이혼한 후, 우리는 외가댁에서 살았다. 그 집 대문 안에는 두 채의 집이 있었다. 커다란 안채에는 집주인 할머니가 노모를 모시고 살았고, 길고 좁다란 구조의 바깥채에는 외할머니와 큰외삼촌네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그 중 우리는 안채의 작은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단칸방으로 들어가던 날, 신발장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신발장 가장 밑 칸이 우리 세 식구의 장소였다.
그 무렵 나는 어디를 가서도 엄마의 옷깃을 붙잡고 떨어지지 못 했다. 외할머니, 큰외삼촌, 외숙모, 친척오빠와 동생, 집주인 할머니와 왕할머니까지.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이라는 공간에, 어느날 한 거번에 쳐들어온(사실 우리 가족이 쳐들어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많은 타인들이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잘 따르고 좋아했던 반면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그때부터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방어모드’에 돌입했던 것 같다. 세 가족이 한 대문 안에 살며 낯섦까지도 응집된 밀도 높은 공간. 그 중 유일하게 익숙하고, 나를 지켜줄만한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소심한 기질이 강화되었다. 심지어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엄마 귀에 속삭이곤, 내가 민망하게 않게 전달해주길 기다리곤 했다. 엄마 없이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 그렇게 몹시도 엄마에게 의지했다. 의지하면 의지할 수록 더 의지해야 했기에, 엄마는 나의 전부가 되었다. 하루종일 야근하는 엄마를 목빠지게 기다리며, 그 얼굴이나 손길을 갈구했다. 엄마는 지금도 퇴근 시간에 맞춰 까만 골목 앞에 나와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왜 나와있냐고 물으면 ‘외숙모가 나한테 뭐라고 했어…‘라며 투정을 부리더란다. 엄마는 외숙모를 많이 미워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외숙모도 억울할 상황이었다.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이혼한 시누이와 조카까지 눈앞에 아른 거리는 걸 감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내가 미웠다기 보단, 와일드한 아들 둘만 키우다보니 잘 울고 잘 꽁하는 조카를 이해하고 다루지 못하셨을 뿐이다. 외숙모는 가족 여행과 가족 외식에 나를 끼워주고, 삼촌이 내게 휴대폰이나 자전거, MP3를 사줄 때도 모른척 해주셨다. 나에겐 충분히 인간적이고 따뜻한 분이셨다.
나는 외할머니와 친척 어른들의 돌봄을 많이 받고 이렇게 잘 클 수 있었다. 하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며 돌봐야할 손주만 총 4명, 이미 성인이 가까워오는 청소년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당연히 나에게까지 닿는 손길은 적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해내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와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숙제를 하거나, 미약하게 나마 동생을 챙기는 것들이었다. 그중 가장 큰 일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이었다. 돌봄 받지 못하는 처지를 감내해야하는 것. 그래서 엄마와 떨어져 있던 만큼, 엄마와 함께 있을 때면 더 종종거리며 붙어있으려 했던 것이다. 엄마는 넘치는 애정으로 우릴 키웠다. 우리에게 빨래, 청소, 요리를 시키지 않았다. 중학생 때까지도 아침이면 엄마가 양말을 신겨주었다. 그렇게 나는 마치 식물처럼 엄마가 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아이가 되었다. 더 달라고 말할 수록 더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엄마는 우리를 잘 먹여살렸다. 먹여살림은 정말 중요하다.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 아주 많이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서적 돌봄’일 것이다. 거창한 말이지만 나는 이것을 아이가 성격을 형성하고 관계 맺기를 연습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성장’을 돌보아주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정서적 돌봄의 가장 큰 부분은 ‘조건 없이 사랑받는 믿음‘과 ’충분한 소통‘이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 엄마는 종종 매를 들어 우리를 훈육했지만,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부터는 방법을 달리했다. 자기학대가 그 방법이었다. 한 번 핀트가 나가면, 엄마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당신 몸에 물을 뿌렸다. 한겨울에, 가뜩이나 보일러도 제대로 틀어본 적 없는 집에서, 가장 차가운 공간으로 들어가 온몸에 찬물을 뿌리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엄마는 매달리는 나와 동생을 내보내고 문을 걸어잠궜다. 문을 온통 두드리며 잘못했다고 빌면 엄마는 아예 집을 나가버렸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시간동안 엉엉 울며 거리를 떠돌고 있으면, 엄마가 나타났다.
“동네 창피하니까 울지 마.”
그것은 동생과 내가 ‘당하는 일’이었다. 엄마와의 대화는 차라리 포기와 가까웠다. 언제 엄마의 버튼을 누를지 알 수 없어서 최대한 착하고 조용하게 살기로 했다. 무기력하게 당하는 소통 방식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자란 나는, 엄마가 ‘소통’을 요구할 때면 당황하곤 했다.
소통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일상적인 대화나 질문도, 과거를 추억하는 것도, 성장과 영혼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도, 표정이나 스킨십도 소통이 될 수 있다. 엄마의 소통은 주로 ‘뒷담과 마이너스 에너지’로 점철된다. 마땅한 권리를 챙겨주지 않는 회사, 불만스러운 동료들과 지인들, 일가 친척 내 좁은 입지, 나아지지 않는 살림, 길가다 스친 여자들과 티비 속 여자연예인들을 향한 외모 평가. 나에게 엄마와의 소통은 9:1의 비율로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내야하는 심리적 노동에 불과했다. 내가 그 ’노동자‘ 역할에서 벗어나려 하면 엄마는 수십년의 서러움이 올라와 폭발해버렸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엄마는 매번 눈으로, 말로, 몸짓으로 그렇게 말했다.
엄마를 버티게 하는 건 악바리 같은 자존심과 처절한 자기연민, 그리고 두 아이였다.
"너희 둘 데려오려고 나머지는 다 포기했어."
양육권 하나만 바라보고 위자료 한 푼 받지 않은 채 이혼한 엄마는 가장이 되었다. 당신의 삶을 포기하고 자식들만 바라보며 했던 선택은 틀리면 안 되었다. 혼자서 두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애처로웠다. 밤에 불을 끄고 자려고 누우면 엄마는 이혼 스토리를 늘어놓았다. 시댁에서 겪은 수모와 무능한 마마보이 남편을 둔 여자의 비애 같은 것들이었다. 그 이혼 스토리의 주인공이 바로 내 부모였고, 그 부모의 ‘결과물’이 나라는 걸 엄마는 신경쓸 여력이 없었나보다. 내 아이들만은 번듯하게 키워낼 것이라는 악착 같은 자존심만이 엄마를 버티게 했다. 그런 마음이 똘똘 뭉친 것이 내 어머니였다.
특히 엄마의 자존심은 '외모'로 표출되었다. 아빠를 만나기 전에 남자들에게 인기 꽤나 있었다는 자랑을 꽤 자주했다. 고르고 골라 시집 간 게 너네 아빠라는 한탄도 더해서. 아름답던 전성기에 대한 매련인지, 엄마는 집앞 슈퍼 조차도 편한 차림으로 가지 않았다.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깨까지 내려오는 노란색 펌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스타일이다. 여웃돈이 생기면 옷과 신발, 화장품을 사는데에 썼다. 당신의 외모 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외형도 중요했다. 특히 첫 째에 여자 아이였던 나는 더더욱 그랬다. 없는 형편에 늘 브랜드 유아동복을 사입힌 것이 엄마의 큰 자랑이었다.
돌아보면 엄마는 나에게 궁금한 것이 거의 없었다. 아주 조금 남아있는 관심은 오로지 ’돈‘과 ‘외모’에 관한 것 뿐이었다. 이를 테면 나의 연봉, 내가 산 물건의 가격, 내가 가진 조금의 여윳돈, 내가 어딜 가서 손해보진 않는지 하는 것들. 나의 체중과 부스스하게 멋대로 자란 머리카락, 다 떠버런 어색한 화장 같은 것들. 그게 엄마의 세계였다. 내 꿈도, 인생 목표도, 버킷리스트도, 사랑도, 불안도, 존재적 갈증도 엄마의 관심 밖이었다. 아니, 엄마가 모르는 세계였다. 모르기에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먹고 사는 것 외에는 관심줄 여력조차 없었던 여인. 엄마에게 나는 외계인이었고, 그에게 나를 이해시킬 길이 없었다.
‘더는 안 돼.’
마치 어떤 계시처럼, 엄마의 세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청소년기는 ‘이중 생활’이었다. 학교에선 활발하고 무리지어 다니는 아이로, 집에서는 소심하고 무기력한 아이로. 내가 엄마에게 더이상 무언가 기대하지 않듯, 엄마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도록 천천히 꾸준히 엄마를 실망시켰다. 하교 후 밤 늦은 시간까지 친구 집에서 버티다가 막차마저도 놓쳐서 밤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왔다. 엄마는 그런 내가 친구만 좋아한다며, 친구집네 가서 살라고 다그치곤 했지만 그 댁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아서 가지 못했다. 학교 생활이나 대외활동을 열심히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엄마는 모르는, 이해할 수도 없는 나만의 세계를 조금씩 만들어 갔던 것 같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성장과정이었지만, 엄마와 제대로 분리되지 못한 채 성장한 나에게는 마치 비밀 조직을 만드는 것 같았다.
스물아홉 살까지, 이십 대가 지나가는 내내 나는 엄마와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다 어떤 작은 구원을 만났다. 나에게 제 2의 보금자리가 생긴 것이다. 몸의 보금자리에서 마음의 보금자리로 이동을 결심했다.
‘이해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그렇게 나의 작은 세계가 완성되어갈 무렵, 나는 집을 나왔다. 엄마의 심장은 눈물로 찢겨졌다.
방 안에 매일 같이 틀어져있던 만화영화의 소음을 기억한다. 비디오 가게에 들러 디즈니 테이프를 빌려 한 없이 돌려보던 기억도. 거기에는 사랑받는 아이들이 많이 나온다. 가족의 사랑, 연인의 사랑, 친구의 사랑, 인류의 사랑이 모두 나온다. 현실 세계의 사랑은 만화와는 조금 달랐다. 현실의 사랑은 돈과 관련이 많았다. 엄마의 사랑도 그랬다. 내게 옷을 사주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사주고, 같이 쇼핑을 할 때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는다 느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게 허무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알았어야만 했다.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걸 궁금해해준 사람이 없었기에, 나도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채워지지 않는 지독한 외로움이 아빠가 없는 편모가정이라서 느끼는 것이리라 믿고 싶었는지도. 눈 앞에 없는 아빠를 원망하면 편하니까. 하지만 아빠에 대한 원망과 무시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으로 돌아와 내 존재를 흔들었다.
어느날 깨달았다. 당신의 눈 속에는 내가 없다.
엄마는 내 눈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다. 나는 어떤 이의 외로움을 달래고, 감정을 해소하고, 노후를 책임지기 위해 태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그만 눈을 감고 싶어진다. 당신에게도 감정이란 게 있고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당신은 정작 스스로의 마음을 돌볼 줄 모른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타인의 마음에도 마음을 쓸 줄 모른다. 인간에게 마음 외에 무엇이 중요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마음이 없으면 이런 가난한 삶은 진작에 포기해도 되는 것이었다. 효율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니까.
내 어머니를 가슴 아플정도로 절절하게 사랑했다. 어른은 종종 아이들이 내뿜는 순수한 사랑을 가볍게 여기거나 도리어 귀찮게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거 같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주아주 절대적이다. 실제로 부모의 관심과 애정이 자신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었기에 어쩌면 본능적일 정도로 절대적인 사랑인 것이다. 엄마를 사랑할 때 나는 그를 동정했고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함께 행복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벌하고 싶었다.
엄마는 나를 아껴주었어야 했다. 성적이나 외모나 같은 조건 없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물었어야 했다. 부모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하나의 인격체로써 자녀를 대해주어야 자녀도 비로소 부모를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삶을 이끌 수 있게 되기까지 어른의 도움을 충분히 구하고 삶의 올바른 방식을 배우게 된다.
과거로 돌아가 엄마를 꾸짖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엄마를 실컷 미워하기로 했다. 때때로 울화가 치밀만큼 엄마가 밉다. 그래도 그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껏 엄마를 ’사랑하고 이해하느라‘ 내 마음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니까. 이 억울함과 기막힘을 해소해야만 내 남은 생, 진짜로 엄마를 사랑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나는 엄마를 미워한다. 이 미움이 다 소진되길 바라며, 더 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