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위태로운 화장실
나의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통째로 삼킨 그 집에는 작은 화장실이 있었다.
일명 화변기라고 하는 일본식 변기에, 커다란 물통에 물을 담아 놓고 바가지로 물을 퍼서 내려야 하는 열악한 화장실이었다. 한 평 남짓한 그 공간에서 나는 늘 무서운 상상을 했다. 화장실 문이 언제 벌컥 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초록색 페인트 칠을 한 낡은 나무 문은, 매우 부실해보이는 작은 걸쇠로만 잠글 수 있었다. 누가 술 먹고 발길질이라도 한 건지 곳곳에 부서진 자국까지 있는 문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잠금쇠가 애처롭기까지 했다.
"저깟 고리는 누군가 문 한 번 ‘쾅‘ 치면 휙 풀려버릴 거야."
볼일을 보면서 늘 그런 생각으로 문을 응시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나의 위태로운 화장실. 추운 겨울에는 난로를 틀어 놓았지만, 난로는 물통의 몫이지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나는 마치 이웃집 이불 속에 숨어든 사람처럼 그 온기의 끄트머리를 잠시 빌려쓸 뿐이었다. 집에는 남동생을 비롯해서 외삼촌, 친척오빠, 친척동생 등 남자들이 많았다. 집주인 할머니, 왕할머니도 늘 나를 긴장하게 하는 존재였다. 10명이 사는 집에 화장실은 하나. 나는 늘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덜커덕"
똑똑똑... 조심히 두드려봐도 되련만, 우리 식구들은 기어코 문을 덜컥 열어 보고서야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물러났다. 그때마다 심장은 내려 앉았고 온몸이 작게 떨렸다. 조금만 더 세게 당기면 저 잠금쇠가 풀릴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 화장실은 내게 수치심을 알려주었다. 곧 문이 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이 안에서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열망에 가까운 마음이 생겼다. 배변이라는 가장 수치스럽고 취약한 순간이 언제 드러날지 모른다는 위기감. 그것은 내 정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내 치부는 절대 들켜선 안 된다'
반면, 단칸방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화장실은 나의 숨숨집이 되어주었다. 숨숨집은 독립생활을 하는 고양이의 본성에 맞춰, 집고양이가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마련한 작은 집이나 소파 밑 같은 좁은 공간을 뜻한다. 고양이가 본능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구역인 것이다. 내 방이 없이 사는 동안 나는 ‘혼자 있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걸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럴 때면 나는 만화책 한 권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똑바로 일어설 수도 없는 낮은 천장 때문에 오로지 쪼그려 앉은 자세로 버텨야했지만, 그래도 난 화장실이 좋았다. 거기선 온전히 나만 생각할 수 있었다. 아무리 쥐가 나도… 그 집에 화장실만큼 편한 공간은 내게 없었다.
엄마는 화장실에 오래 있어 버릇하면 변비가 생긴다고 나무랐다. 볼일을 본다는 본연의 기능 외에 엄마가 상상할 수 있는 화장실의 다른 용도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내 방이 생기고 나서도 나는 화장실에 오래 있었다. 사람들은 타인이 ’혼자 있는 시간‘을 참 쉽게 침해한다. 내 방이 생긴 이후에도 한동안 엄마는 방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 내가 엄마 말을 듣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엄마는 닫힌 내 방문을 아무 때나 벌컥벌컥 열고 들어왔다. 샤워할 때는 다를까? 같은 여자니까 괜찮지 않냐며 세탁기를 돌리러 들어오고, 너무 급하다며 화장실을 쓰겠다며 들어오고…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화를 내도 그랬다. 진절머리가 났다.
친척 대부분이 한 동네에 살고 왕래가 잦은 편이라, 집에 오면 내가 자고 있던 쉬고 있건 공부하고 있건 상관하지 않고 내 방에 함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와서 함께 뭔가 먹으며 어떤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나의 시간이 공공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밖으로 나오라는 사람은 많은데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향형 인간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절대 침해해서는 안 되는, 문을 벌컥 열어서는 안 되는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배변의 시간이었다. 문을 걸어 잠궈도 왜 잠그냐고, 당장 나오라고 하지 않는 유일한 시간이나 다름 없었다. 인간의 취약함이 내게 허락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마음의 노동을 쉬고, 마음 껏 상상을 하고, 종종 책도 읽었다. 나는 화장실이 좋았다.
본가를 나와 동거인과 살고 있는 지금도 나는 자주 화장실에 숨어든다. 사실 나는 화장실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화장실을 좋아해야만 했던 것이다. 타인의 침범을 거절하는 법을 몰라서. 수동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화장실은 나에게 애증의 공간이다. 취약이자 안정의 공간이다. 치부이자 나다움의 공간이다. 수치심이자 다행이다.
내 안에는 작은 초록문 화장실이 있다. 순간 긴장이 몰려오거나 불안과 경계심이 생길 때면 그 화장실 안에 숨는다. 이제 나는 대짜로 뻗어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는데도. 나의 화장실 문을 부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본다. 내가 저 이에게 그런 권리를 준 적이 있나? 고민해본다. 어쩌면 나의 공간을 화장실로 한정한 건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침해하지 말아달라.‘고 말할 용기가 내게 없었기에. 얌전히 화장실로 피신한 건지도.
하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 부디 내향인들이 혼자 시간을 보내도록 좀 내버려 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