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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로소 Oct 27. 2024

친구네 집에서 살고 싶었다

나의 자매들에게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가족 말이다. 어머니가 있었으면 했다. 존경하고 배울 점이 있는 어른. 내가 조금 삐뚤고 부족하고 모났을지라도 그런 내 모습까지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어머니가 되는 미래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싶었다.

나에겐 작은 구원들이 있다. 꼭 나만큼, 작고 여렸던 나의 친구들. 나만큼 아팠고 나만큼 사춘기였지만, 기꺼이 나를 지탱해주었던 아이들. 그러나 때때로 내 마음을 찢어놓았던 친구들도 알고 있다. 그 아이들 덕분에 내 마음에 새 살이 돋았다. 아픔을 딛고 함께 간직한 추억은 남겨두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들에게 상처 받는 게 좋았다. 영광스러운 상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종일 친구 집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학교 끝나자마자 들어가서 저녁식사까지 얻어먹고 날이 깊어져서야 나왔다. 그러는 동안 친구들의 어머니는 나에게 밥을 해주고, 간식을 챙기며 따듯하게 대해주셨다. 그 꾀죄죄한 남의 집 아이를 기꺼이 보살펴주셨다. 나아가서 가끔은 당신의 딸과 같은 옷을 사 입혔고, 찜찔방에 데려가 등을 밀어주었다. 어른으로써 고민상담을 해주었고, 가족 외식에 초대하며 '친구의 엄마'가 아닌 진짜 어머니처럼 대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살가운 자매 같은 친구를 두었다. 나는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아이였다. 지금도 그렇다. 생활력이 매우 약하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 외에는 상식이 부족하다. 늘 덤벙거렸으며 멘탈도 약했다. 특히나 정서적으로 나는 친구들에게 많이 기대었다. 가끔은 스스로도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먹이고 입히고 고생해서 키운 엄마보다 내 마음을 들여다봐주었던 사람들 덕에 내가 컸다는 생각이 들다니 말이다. 조금은 죽고 싶었던 날들이 합쳐져 지금의 내가 되었기 때문일까? 그럴 때마다 내가 조건 없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그들에게서 보았기 때문일 까?

지금도 멘탈이 무너지는 날이면 친구 G에게 전화를 건다. G는 가장 오랜 기간 나를 견뎌준 친구다. G는 누구보다 과민하고 자기 파괴적인 나를 잘 알고 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주변 사람들을 깔보기 시작했다. 그들보다 대단히 잘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당시 나는 만화책을 읽으며 형성된 나만의 독특한 세계관 속에 있었다. 일본 만화를 많이 보다보니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현실과 너무 먼 이상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문화의 가장 이상적인 장면만을 모아보았기 때문이리리라. 그런 나를 이해해줄 사람이 없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상한 사람이 되기 싫다는 마음만 강박처럼 박혀, 더더욱 친구들과 비슷한 사람이 되려 말과 행동을 통제했다. 방어기제가 강해지다 못해, 타인의 마음을 다 꿰뚫어보아야 안심이 됐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학교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원하는지 다 계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산에 따른 결론을 사실로 믿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의 머리 꼭데기에서 다 관조하고 있는 사람이라 착각했던 것이다.

특히나 나는 나를 내려다봤다. 내 행동 하나하나를 비웃고 조롱하는 목소리가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외치고 다녔다.

“난 잘못이 없어!”

사실 그 병은 지금도 낫지 않았다. 억울함이라는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뭐든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내가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다며 떠나갔다. 아직도 나는 내가 정말 '그런지' 의심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억울함은 쉽게 사그라드는 감정이 아니었다.

스스로 과민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기 때문에 내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지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의 실수, 실패, 까칠함에 당위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한 번 하소연을 하기 시작하면 모든 디테일까지 다 말하느라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곤 했다. 어릴 때는 하루 종일 내 얘기만 하는 때도 많았다.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친해진 G는, 그 시절부터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끊고 섣불리 결론을 물은 적이 없다. '네가 틀렸다', '네 생각이 과하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럴만 했어. 나였어도 그랬을걸?”

G에게 그럴만 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안심이 될 수 없었다. ’장황한 연설‘ 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한 후 아주 적절한 리액션과 함께 가장 듣고 싶은 그 말로 위로해준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도 더러 있겠지만, 눈빛이나 태도에서 티를 내지 않는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온전히 내 편이라는 감각을 준다. 내가 어떤 사람을 비난하고 싶어 하면 기꺼이 같이 비난해준다. 내가 두 가지 선택지를 고민하면, 내가 조금 더 마음이 가는 쪽을 권한다. 자책하며 내 뜻을 굽히려 할 때도, 굽히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준다. 이것이 얼마다 뛰어난 '듣기'능력인지 놀라울 정도다.

나는 친구를 아끼고 소중히하는 마음을 G에게 배웠다. G의 놀라운 듣기 능력은 나를 소중히 여겨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 이야기의 한 파트도 놓치지 않고 들어주는 것. 속이 너무 뻔히 보여 더 해주기 싫을 ’답정너‘ 위로와 편들기도 기꺼이 해주는 것.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친구가 자신을 조금만 더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진심. G는 나에게 우정의 교과서 같은 사람이다.

내게는 성장 시기마다 피부처럼 붙어 다닌 친구가 있다.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 동기까지. 학업을 이어가는 동안에는 계속 그랬다.

어쩌면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는 발악인지도 모르겠다. 내게 친구들의 집은 저마다의 세계였다. 나의 집에는 없는 고소한 밥 냄새, 따듯한 방바닥, 저마다의 새것들로 꾸며 '평범'한 공간들. 그리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가면 작은 요람 같은 친구의 방이 있었다. 아늑하고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거실로 나가 함께하는 시간이 허락된 곳. 작은 꿈이 점차 크게 자라나는 곳. 그래 너는 이런 곳에서 자라왔구나. 그런 그 아이들이 좋았다. 나와 달라서 좋았다.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때때로 안 좋은 방향으로 흘렀다. 나는 친구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친구가 나를 빼고 다른 친구와 노는 것이 싫었다. 친구를 둘러싼 나 이외의 관계가 질투 났다. 늘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친구 마음 속 우선 순위 맨 앞에 있고 싶었다. 우정 앞에 가족애나 사랑이 있었다. 그 세 가지가 공존할 수는 있었지만, 우선 순위를 침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다. 그러나 아깝다는 마음은 없다. 그 순간에 나는 최선을 다 했고, 그 친구들 역시 그랬다. 서로를 조용히 혹은 요란하게 떠나보내는 것도 우리들의 우정 방식이었다.

최근에 모성에는 기능적 모성과 관계적 모성이 있다는 걸 배웠다. 엄마는 나에게 엄청난 기능적 모성을 퍼부어 주었다. 내가 먹고 자고 쓰고 배우는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의 살을 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관계적 모성은, 오직 친구들에게 받았다. 공감, 응원, 보살핌, 아낌, 때로는 애틋할 정도의 정서적 교감... 누군가와 함께 슬퍼하고 함께 웃었던 모든 순간들을 떠올리면 친구들이 있다.

어릴 적 엄마는 친구가 그렇게 좋으면 나가서 친구랑 살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 어쩌면 친구들은 나에게 어떤 '책임감'을 가질 의무가 없었기에 쉽게 마음을 주고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맞다. 우리는 서로를 책임지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그저 관계 자체가 소중했던 것이다. 혹은 이 관계 속의 자신이 소중해서, 이 추억이 평생 우리를 먹여 살릴 걸 알아서. 탱탱볼처럼 주고 받는 예쁜 감정들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 나는 그런 관계가 필요했다. '책임감'이 빠진 자리에 '마음의 여유', 그 여유로 나를 품어줄 수 있는 둥지가 필요했다.

친구와 가족이 되고 싶었다. G의 동생처럼 살가운 가족 구성원이 있으면 했다. J의 어머니처럼 집에 계시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주는 어른이 있었으면 했다. C의 부모님처럼 내 친구까지 딸처럼 아껴줄 수 있는 도량이 있었으면 했다. L의 부모님처럼 매달 서점에 데려가 원하는 책을 두 권씩 사줬으면 했다. A의 어머니처럼 차를 타고 학교 앞까지 데리러 오거나 엉뚱한 농담으로 웃게 해주었으면 했다. P의 부모님처럼 삶의 변곡점마다 적적한 어른의 조언을 해주었으면 했다. 어쩌면 나도 그 아이들의 가족이 될 수 있었을 테다.

나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곧 사라질 것 같은 순간에 친구와 이웃들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던 것이다. 비록 불 꺼진 차가운 골방에 던져졌던 삶이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내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때, 기꺼이 받아주리라 믿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믿음에서 나오는 뻔뻔함에 나를 맡겼다. 민망해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에게는 타인을 받아들일 힘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너무 좋다. 외로움과 생존만이 가득한 그 방에서 나는 다시 내일을 기대하며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친구들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안녕? 하고 말했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이미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타인을 받아들일 힘이 있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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