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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로소 Oct 27. 2024

내게 어울리는 자리와 꿈

찢어진 꿈의 조각을 쥐고

나에게 어울리는 꿈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나의 수준과 상황에 맞춰 ‘타협된 꿈’을 꾸고, 그 꿈을 진심으로 좋아하려고 애를 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내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냥 가수가 아니라, 아이돌이 되고 싶었다. 요즘처럼 다양한 음악이 사랑받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 시절 가수란 아티스트보다 우상에 가까웠다. ‘시대의 아이콘’이 되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는 ‘SES놀이’에 심취해있었다. 학교 끝나면 서점에 들러 낱장으로된 가요 악보를 사서, 피아노 있는 친구 집에 모여 노래를 불렀다. 각자 파트를 맡았고, 나는 ‘슈’였다. 거울 앞에 쪼로록 서서 뮤직비디오라며 간단한 율동과 동선을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불러댔다. 때때로 친구네 빌라 단지 앞에서, 때때로 집 근처 놀이터에서 그러고 한참을 놀았다. 표정 연기와 완벽한 립싱크까지. 나는 우리 동네 SES였다.

중학교에 올라가며 그런 놀이는 관두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수가 되기 위한 외모, 가창력, 표현력 아무것도 내겐 없었다. 나에게는 스타성이 없었다. 동네를 누비며 SES 노래를 부르던 아이는 나의 역사 속 한페이지로 점점 사라졌다. 그러다 불쑥, 사람들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면 소심한 내 마음의 벽을 뚫고 ‘우리 동네 슈’가 튀어나갔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노래방에서, 학교 축제에서 겁도 없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이 되면, 내가 왜 그랬지 하고 후회했다. 가수는 ‘노래 부르는 사람’일 뿐인데, 내게는 죽도록 동경하면서도 평생 맞지 않을 옷이었다.

그렇게 나는 천장에 붙인 야광별처럼 그리움의 눈으로 첫 번째 꿈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가끔 손을 뻗어보아도 어차피 닿지 않는 거리. 그정도로는. 너무나 크고 선명한 그 꿈은 바로 저기에,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절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 그 환하던 별도, 어느 순간부터 희미하게 껌뻑거리기 시작했다.나 자신에게도 그런 꿈은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뗐기 때문이다. 실패는 도전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렵기에. 화려한 도전이 외면받고 났을 때 다시 일어설 힘이 내겐 없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타협된 ‘두 번째 꿈‘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 뿐이었다. 두 번째 꿈은 여러 번 바뀌었다. 어떤 날은 만화가가 되고 싶었고, 어떤 날은 화가가, 문학 선생이 되고 싶었다. 패션디자이너나 잡지 에디터가 되고 싶기도 했다. 그 중 가장 미련이 남는 꿈은 사진작가다. 하지만 예측 가능하게도, 비용이 많이 드는 꿈은 자연스럽게 내 선택지에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내 곁에 남아준 꿈이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작가‘라는 꿈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던 건, 어쩌면 말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하고싶었던 건 몽땅 돈이 안 되는 예술 비슷한 것이었고, 예술을 하려고 하면 돈이 드니까. 뭘 하려고 할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말렸다.

‘그거 되게 힘들대.’ , ‘그거 돈도 못 벌고 배고프게 산대.’ , ‘그거 배우는데 비용이 엄청 많이 든대.’

그리고 그들이 유일하게 말리지 않는 게 글이었다. 노트 몇 장과 연필 한 자루면 되는 그 행위는 별로 말릴만한 거리도 안 되었다. 게다가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는 생각보다 ’써야할 일‘이 자주 생긴다. 선생님들의 가벼운 칭찬과, 친구들의 가벼운 동경은 ’글을 쓰는 아이‘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그러다 극작을 전공하게 되었을 때에는 내 전부와도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됐던 것이다.

바꿔말하면 글쓰기는 나에게 가성비 좋은 ’적성‘이었다. 심지어 내겐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다. 내겐 다수가 갖지 않은 근사한 불행이 있었고(이를 테면 편모가정, 아빠가 다른 동생, 차상위 계층이라는), 오랫동안 밥을 먹듯이 읽어온 참고서(만화책, 애니메이션)들이 있었고, 타고난 외로움이 빚어낸 감수성과 계절에 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글을 쓰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줬다. 반에서 성적도 꼭 중간이던 나를 콕 짚어내어 칭찬해주었다. 난 칭찬 받고 싶어서, 관심 받고 싶어서 글을 썼다.

시간이 쌓이자, 글은 기꺼이 내 친구이자 동료가 되어주었다. 그걸로 돈도 벌고 밥도 먹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물도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내 인생을 감싸 안아올렸다. 글은 내게 그랬다. 때때로 서로 미워하고 다툴지라도 우린 다시 붙어다녔다. 나에겐 글로 이루고 싶은 이상과 새로운 꿈도 생겨났다. 네가 있는 한 나는 괜찮아. 살아갈 수 있어. 이 세상에서 무언가 역할을 할 수 있어.

그러나 참 이상한 일이다. 가수라는 꿈은 늘 내 그림자에 붙어 따라다녔다. 뒤를 돌아보면 늘 그애가 있었다. 어떨 때는 그게 너무 끔찍해서, 나는 ‘작가’로 ‘가수’를 황급히 덮어버렸다. 아이돌 기획사에서 들어가 음반기획자가 되겠다, 작사가가 되겠다는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쓰는 재주를 앞세워 어떻게든 음악과 밀회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음악을 향한 동경은 컴플렉스가 되어 있었고, 어느새 자라난 두 번째 꿈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눈팔 시간이 부족해졌달까.

어느날, 손을 쭉 뻗어 천장에 붙은 별을 떼었다. 허망하게도 그 꿈을 잡는 건 쉬웠고, 내 키는 훌쩍 자라나 있었다. 아니, 꿈에 잔뜩 묻어 있던 그 시절의 열정과 욕심 같은 것들이 날라간 탓이기도 하겠다. 그 때의 감정들은 시간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최근 나는 다시 꿈에 도전하고 있다. 아마추어들끼리 진행하는 음반 제작 프로젝트에서 무려 4대 2의 경쟁률을 뚫고 보컬로 선정이 됐다. 연말에는 음원이 나올 것이고 나는 사실을 널리널리 소문내고 길거리에서 버스킹도 해보려고 한다. 내가 꿈꾸던 모습과는 조금 다를지라도, 한 발자국 다가가 별을 따보려 한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만, 처음 가슴을 울렸던 그 시절의 꿈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솔직히 아직 그  꿈을 그리워하고 있다. 꿈은 그렇다.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득 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이룰 수 있는 것을 꿈이라고 부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꿈은 가끔 막막한 감정을 불러온다. 그럼에도 살아있음을 만끽하게 해주는 이 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꿈을 줄이고 현실화해서 작게 이루라는 게 아니다. 일단 내가 정한 이상적인 내 모습이 있다면, 그 모습을 따르기 위해 반드시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엎어지고 깨지고 구르고 창피를 당하더라도. 진심으로 포기할 수 있을 때까지 내 모든 걸 쏟아보라고. 내 꿈을 꼭 잡고 놓치지 말라고. 그것이 아이러니하게 꿈을 이룬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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