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라보는 건 나를 받아들이는 것
어려서부터 중요한 날이면 나는 옷을 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명절이나 생일, 중요한 자리에 가야 하면 엄마는 내게 새옷을 사주었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돈을 아끼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외모에 관련해서는 특히 더 그랬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가게 되면서 엄마와 나는 틈만나면 집 앞에 있는 단골 옷가게에 들렀다. 청소년기를 지나오며 부쩍 살이 오른 나는,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을 때까지 그 작은 공간에 걸린 옷이란 옷은 모두 입어볼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중에 체형에 잘 맞는 옷은 거의 구매하고 싶어 했다. 한 번에 네, 다섯 벌을 사는 건 예삿일이었다. 엄마는 그 옷가게에 늘 몇 십만 원 정도의 외상을 걸었다. 옷을 사들고 집에 오는 길에 엄마는 내게 늘 살을 조금만 빼면 입을 수있는 옷이 많을 텐데... 라며 한탄했다. 나는 옷가게에 갈 때마다 뚱뚱한 내 모습이 싫었지만, 그래도 옷이 좋아서 매번 사들였다.
집에 오면 그날 산 옷을 입어보며 엄마 앞에서 패션쇼를 했다. 이 옷은 이래서 잘 샀고, 저 옷은 저런 점이 좋고. 엄마에게 브리핑을 했다. 엄마는 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을 온몸으로 받을 때면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철들 무렵부터 엄마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 덴마크 다이어트라는 이름의 삶은 계란, 블랙커피, 식빵 한 조각, 소고기 조금을 주식으로 하는 초절식 다이어트를 하기도 했고, 식욕억제제를 먹기도 했다. 더러는 꽤 많은 체중을 감량하기도 했다. 10킬로그램 이상을 감량하기도 했지만 어김없이 요요가 찾아오곤 했다. 나도 엄마를 따라서 여러 번 다이어트를 했다. 첫 다이어트는 중학교 때 했던 초절식 다이어트였다. 대학생 때는 식욕억제제도 얻어먹었다. 나는 8킬로그램까지 감량을 해봤지만 나 역시 요요를 겪으며 더 살이 오를 뿐이었다.
환갑을 넘어선 지금도 엄마는 체중 감량에 힘쓰고 있다. 갑상선 암을 비롯한몇 번의 수술 후 몸이 많이 상한 엄마는 3개월에 한 번씩 정기 검진을 받는다. 체중이 빠지면 간수치가 바로 정상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엄마의 체중은 여전히 고무줄 같다. 나 역시 현재도 체중 감량에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엄마가 그랬듯, 나도 인생의 반 이상은 다이어트를 하며 보내고 있는 듯하다.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내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눈은 안검하수가 심해서 사진을 찍을 때면 늘 눈을 크게 떠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코는 뭉뚝하고 뚱뚱해서 영 봐줄 만한 데가 없었고, 입술은 작고 도톰해서 안 그래도 큰 얼굴이 더 커 보이게 하는 듯했다. 눈썹은 숱이 많고 치켜 올라가서 부드러운 인상을 주지 못 했다. 피부는 또 어떻고, 어려부터 기름진 피부에 트러블도 자주 일어났다. 머리카락은 반곱슬에 숱이 쓸데없이 많아서 어떻게 스타일링을 해도 그냥 머리숱 많은 애로 밖에는 안 보였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쓰기 시작한 안경은 낮은 코를 더 낮게, 작은 눈을 더 작아 보이게만 했다. 어려서 제 때 유치를 빼지 못 해 치열이 삐뚤빼뚤하고 양쪽에 커다란 덧니까지 나 있었다. 이마는 좁아서 앞머리르 내려도, 올려도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쌍꺼풀 수술과 라식 수술을 했다. 쌍꺼풀 수술은 '넌 눈매만 바뀌면 인생이 바뀔 거 같다'며 외숙모께서 비용을 내주셨다. 치아 교정도 하고 싶었지만 비용이 너무 비싸 미루다 보니 30대가 되었다. 눈썹을 열심히 뽑아서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다듬었고, 머리카락은 열심히 매직과 펌을 해대다보니 숱이 많이 줄어 그럭저럭 볼만한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입술을 삐죽인다.
스마트폰이 생겼을 때부터 대학생까지만 해도 내 휴대폰은 여자 연예인 사진으로 가득했다. 주로 꿈처럼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배우, 아이돌, 외국의 모델들, 이름을 모르는 외국 여성들 사진도 한 가득이었다. 내가 사진을 고르는 기준은 단 두 가지였다.
나도 이런 분위기를 가지고 싶다.
나도 이런 몸매를 가지고 싶다.
그러나, 사실 '분위기'라는 것도 연예인급으로 예쁜 몸매와 얼굴에서 나오는아우라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었다. 나의 체형과는 180도 다른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탐색하며 나름대로 폴더를 만들어 분류하는 작업도 했다. 그때 당시 나는 그것이 내 나름대로의 탐미 행위라고 착각했었지만, 그 착각이 산산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마치 벼락처럼 페미니즘 바람이 불었다.
어느 날 온 학교에 페미니즘 구호가 적힌 포스터가 붙었다. 그리고 당시 1학년이던 여학우가 학교의, 특히 교수님들의 성차별 실태를 폭로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게재했다. 포스터를 붙인 사람임에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글을 저격하는 남학우의 글도 올라왔다. 남학우는 학교의 교수님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공개토론회까지 열렸던 걸로 기억을 하지만,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나는 부끄럽게도, 그 여학우의 행동에 몹시 당황했으며 그의 편에 함께 서주지 못했다.
먼저 그가 폭로할 때 주요하게 거론한 ‘교내 작품’은 우리 과에서 만든 작품이었고, 더불어 우리 과 전임교수의 실명을 언급하며 성차별적 언행을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나에게 페미니즘의 개념은 교양수업에서 짧고 얕게 배운 내용이 전부였기에 일상에서, 이렇게 전위적으로 직면한 것이 처음인 이유도 있었다. 나는 그가 불필요하게 나선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행위가 여성들을 오히려 더 불편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미투가 있기 4, 5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느꼈고, 그래서 더 강한 반발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인생을 통틀어 겪어야 했던 거의 8할에 달하는 부당한 일들의 배경에 성차별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미 수많은 통계가 말해주고 있었다. 긴 부정기, 혹은 자기 검열기를 거쳐 나는 받아들였다. 이 세상이 그 여학우의 말처럼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고맙게도 내가 외면하고 있던 사이, 그들의 외침으로 많은 것이 바뀌고 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아직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가 외치던 구호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계속해서 다른 색깔로 메아리쳤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 어느 날 나는 내 휴대폰 속 갤러리를 바라보다가생각했다.
"아 나는 이들처럼 생긴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 하지만 아니다. 그건 내가 원한 게 아니다. 나는 아마도 영원히 그들처럼 될 수 없고, 될 필요도 없는 것이구나."
그날 나는 휴대폰과 컴퓨터에 있는 모든 여자의 사진을 지웠다. 정리와 분류가 잘 되어 있던 탓에 지우는 것도 쉬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외적인 모든 콤플렉스를 극복했고, 내 외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내 외모를 이루는 요소의 대부분에서 '좀 더 이렇게 생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나 전처럼 '거울 속 이 사람을 어떻게든 좀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때때로 거울 속 내가, 사진 속 내 미소가 예뻐 보이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여성의 옷 사이즈는 꽤 다양해졌다. '마르고 예쁜 애들'만 입을 수 있었던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이제는 많은 의류 사이트에서 큰 사이즈로 판매하고 있다. 내 몸을 받아들이는 데에 큰 역할을 해준 것이 바로 이런 사이즈의 다양화였다. 아무래도 나는 옷가게에서 옷을 고를 때 가장 살을 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옷을 좋아해서 몸을 바꾸고 싶었는데, 몸 대신 옷이 바뀌니 더 이상 몸을 바꿀 필요가 없어진 느낌이다. 이걸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그 덕에 옷에 대한 집착은 조금 더 늘은 듯하다. 최근에는 한두 달 사이에 옷, 신발, 가방, 화장품 구입에만 100만 원을 쓰기도 했다. 왜 그렇게 옷과 신발을 좋아하는 지는 우리 엄마를 보면 알 수 있다. 엄마는 형편이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늘 계절에 맞춰, 새 옷, 새 구두, 새 가방을 마련한다. 환갑이 넘은 지금에도 탈색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노란색으로 염색을 하고 스프레이로 자연스럽게 앞머리를 넘기며, 어깨까지 내려 오는 웨이브 스타일을 유지한다. 나는 그런 엄마가 좋았다. 친구들 앞에 후줄근한 차림으로 나서는 건 싫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그런 엄마를 닮고 싶었다. 그런데 환갑이 넘어서까지 그런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유지해야 하나 생각하면, 조금 갑갑하기도 하다.
엄마는 요즘도 나에게 살 조금만 더 빼라고 성화다. 말로는 내 건강이 걱정돼서 라고 한다. 그러나 엄마는 내 외모를 웬만해선 칭찬하지 않는다. 마음에 쏙 드는 새 옷을 입고 가서 자랑을 해도 쉬이 예쁘다고 해주지 않는다. 이 옷 예쁘냐 어울리냐 괜찮냐 물어봐도 웃기만 한다. 엄마가 뭐라고 하든, 나는 자아도취를 하곤 한다. 내 몸에 맞는 예쁜 옷을 입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다이어트를 하느냐.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나는 사람들 앞에 좀 더 당당하게 나서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한다.
나 자신의 시선은 조금 덜 신경 쓰게 되었지만, 아직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몹시도 신경 쓰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외모뿐만 아니라 내 생각과 감정까지 꽁꽁 숨기게 만드는 매우 악질적인 요소이다. 내 인생에서 뿌리 뽑고 싶은 첫 번째 성질이기도 하다.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금보다 좀 더 날씬한 나를 꿈꾸는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내 모습이 어떻든 사람들 앞에 나섬에 전혀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