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팔에는 줄이 참 많다. 옛날에 생겨서 지금은 흐릿해진 것도 있고, 생긴 지 얼마 안되어서 비교적 선명한 것도 있다. 바로 커터칼로 그어서 생긴 흔적이다. 한창 우울증과 자기혐오가 심했을 때, 나를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럴수는 없으니 대안적인 방법으로서 커터칼로 팔을 긋는 자해를 시작하게 되었었다. 아프지 않냐고? 당연히 아프다. 하지만 아프기 때문에 그게 오히려 묘한 쾌감을 준다. 나 자신이 너무나 혐오스럽기 때문에 내가 나 스스로를 처벌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피가 나오는걸 보고 있으면 해방감마저 들었다. 계속 긋다보니 무감각해져서 더 많이, 더 세게 긋게 되었고 생각보다 흉터가 꽤 남게 되었다.
자해가 습관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여름에는 약간의 난감함이 생겼다. 반소매 옷을 입으니까, 줄이 잔뜩 그어진 내 왼팔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되었다. 아무래도 너무 눈에 띄고 흉측하니까 사람들도 흠칫흠칫 하는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자해한 직후 (그 와중에 배는 고파서) 식당에 갔는데 식당주인이 보기 안좋다면서 가려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혹은 더 나아가, “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느냐”는 질책이나 “무섭다, 혹시 다른 사람을 찌른적도 있냐”는 혐오적 반응을 접한 적도 있다. 물론 그러한 말들은 내가 다시 줄을 긋는 데에 착실한 기여를 해준다. 이해받지 못한다는게 가장 괴로운 것이니까.
자해를 하는건 자기혐오 때문도 있지만,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고립감 때문도 크다.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아무도 나를 몰라주니까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사람들이 나의 고통을 알아줬으면 하는거다. “우울증은 나약한 사람들이나 걸리는거다”,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고작 그거갖고 그러냐, 너보다 힘든 사람도 많다” 라는 식으로 우울증이나 정신질환 등에 대한 한국사회의 무지와 혐오 탓이 크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한테 의지로 걸으라고 하진 않지 않으니까.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도 엄연히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고, 나약함이나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당사자 개인의 의지보다는 주변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정신병력을 숨기게 만드는 사회적 인식을 개선시키고,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지지를 보내는 것은 중요하니까. 나는 그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
트랜스여성으로 정체화한 이후부터는 트랜스혐오자들에게 혐오발언을 들을때마다 자해가 하고 싶었다. 성별을 어떻게 바꾸냐, 정신병 아니냐, 성도착증 아니냐 라거나 느낌만으로 성별을 바꿀 수 있으면 나도 트랜스 oo 할래 같은 말들. 나에게는 내 존재와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그렇게 가볍게 조롱의 대상이 되는걸 볼때마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모든 사람이 욕을 하는건 아니지만 욕하는 사람에 비해서 지지해주는 사람은 너무 적으니까. 내 존재를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통을, 커터칼로 자해를 함으로써 잠시나마 해소하고자 했다. 디스포리아가 극심했을때는 허벅지도 그었다. 성기랑 가까운 곳이라 그랬던 것 같다. 언제였던가, 긋는 것으로도 성에 안 찼는지 어느 날은 집 화장실에서 과도로 허벅지를 찔렀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금속이 살 속을 파고드는 느낌. 그건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닦아도 계속해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 날은 안희정 무죄판결 규탄 피켓시위가 있던 날이라 피를 대충 닦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참가했다. 현장에서도 또 피가 흘렀고 주변 사람들은 걱정 반 의아함 반의 눈길로 말을 걸어왔다. 괜히 무안해서 나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나는 그저 자해한 사실이 들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떤 활동가 분께서 “피흘리는 페미니즘” 이라고 하셨던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때는 결국 일정이 끝나고 병원가서 치료받고 꼬맸다. 의사에게는 대충 ‘넘어졌다’ 라고 둘러댔다. 사람이 (여러 의미로) 넘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 오는 고통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자해를 할때는 내가 어느부위를 어떤 방식으로 얼만큼 아프게 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으니까, 그 통제감에서 오는 쾌감이 있었다. 결국 나를 가장 다치게 할 수 있는건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라는 것을 그런식으로 확인했다. 그래서 자해를 하는건 사실 죽고싶어서가 아니라 살고싶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싶어서,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길 바래서 자해를 한다.
2018년도에 <고등래퍼2>라는 프로에 출연했던 빈첸(이병재)이라는 래퍼가 자신의 정신질환과 정신적인 고통, 자해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랩으로 표현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보통 랩이라고 하면 돈자랑,허세,욕설,여자얘기로 점철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빈첸은 자신의 약하고 어두운 면과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는 정신병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아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힘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라는 등의 억지로 좋은 말들을 보태는 것보다 ‘나도 그렇다’ 라는 담담한 한 마디가 오히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 래퍼가 당시는 청소년이었고, 팬들도 상당수가 청소년이었다. 청소년 사이에서 자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심지어 sns상에서 자해사진을 공유하는 그룹까지 생기기 시작하자 기성세대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갑자기 자해가 유행이 되었다”며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자해를 ‘유행’으로 여겨 휩쓸리게 된다고 보는건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취급하는 편견이 담긴, 지나치게 나이브한 분석이다. “요즘 애들은 나약하다”, “어린애들이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겠냐”, “그냥 관심받고 싶어서 그러는거겠지”, “왜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느냐” 와 같은 비청소년 어른들의 시선이 청소년들을 더욱 고립시키고 청소년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통을 증명해야한다고 느끼게 만든다. 사람들이 자해를 하는건 다들 저마다의 사정과 이유가 있고, 당연히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주변에서 하니까 유행처럼 따라하는게 아니라, 원래 고통 속에 있었던 청소년들이 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어서 좀 더 자유롭게 자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해는 물론 건강한 행위는 아니고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게 좋다. 하지만 자해에 대해서 무조건 금기시하거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식으로 훈계하는 것은 오히려 자해하는 사람들을 위축되게 하고 더 고통속에 빠지게 만든다. 자해행위 자체보다도 그 행위에 이르게까지 하는 원인인 정신적 고통에 집중하고,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언어가 없으면 자신을 해하는 방식으로 말하게 되었을까 하고 자해하는 사람들을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
빈첸이 쓴 가사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 칼빵 개수보다 verse 없는 래퍼 mic 갖다 버려”. 자신이 몸에 그은 줄 개수보다 작업량이 적은 래퍼를 디스하는 내용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전율을 느꼈다. 자해흉터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며 숨겨야 하는 이 사회에서, 그 흉터의 의미를 전복시켜 디스전의 무기로 쓸 수 있다니.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승화시켜가는 사람들은 참 멋지다.
나도 또한 내 자해경험을 재료삼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에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의미를 담아 흉터 위에 타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