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번째 헌혈, 그 다음은?
“헌혈 릴레이를 펼치고자 합니다. 헌혈은 누군가를 살릴 수 있고 나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헌혈증 기부를 통해 사회적 기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임관 20주년 기념행사가 예정된 올해 7월 전까지 현역 및 예비역 장교 동기생 1455명의 헌혈과 함께 헌혈증을 모아 기증했으면 합니다.”
2016년 화창한 봄날, 동기생 한 명이 대한민국 육군 학사장교 27기 총동기회 SNS에 올린 글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현듯 갑자기 헌혈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헌혈 릴레이는 헌혈한 동기생이 헌혈 인증사진을 SNS에 탑재하고 헌혈을 이어나갈 동기생 5명을 지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이 아이디어가 실행으로 옮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많은 동기생들이 자신의 헌혈 인증사진을 보내왔고 자발적인 동참의지를 표현하는 댓글이 올라왔다. 나 역시 인증사진과 함께 5명의 동기생을 지명했다.
그런데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이 과정에서 중복으로 헌혈을 지명받은 동기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지명받은 횟수만큼 헌혈해야 한다”라는 재미있는 기준도 만들어졌다. 이어진 댓글에는 전혈은 두 달이 지나야 다시 할 수 있지만 성분헌혈은 2주만 지나도 다시 할 수 있다는 정보도 공유되었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다시 지명하지는 말아 달라”는 말이나 “당분간 동기들의 연락을 받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재치있는 글도 동기생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서 헌혈 릴레이가 어떻게 동기생들의 공감을 얻고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세 가지의 맛(三味)으로 정리해봤다.
첫 번째 맛은 의미(意味)다. 헌혈 릴레이, 어찌 보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아이디어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와 사회적인 의미까지 부여했다. 의미가 명확하고 이에 대해 공감이 된다면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두 번째 맛은 흥미(興味)다. 흥미는 관심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빠른 시간 내에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이 관건이다. 의미에는 공감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막상 나서는 이가 없다면 흐지부지해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불과 이틀 만에 동기생 한 명이 올려놓은 단 한 장의 헌혈증 사진이 그 역할을 했다.
세 번째 맛은 바로 재미다. 참여하면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직접 만날 수는 없어도 온라인상에서 주고받는 대화들은 재미도 있을 뿐더러 그동안 소원했던 동기들과의 연결고리도 되고 시간을 거슬러 20여년 전 모습으로 다시 만나는 계기도 되었다.
당시 헌혈 릴레이를 통해 모여진 250여 매의 헌혈증은 백혈병 환우의 쾌유를 기원하며 관련 단체에 기증했다. 그리고 나는 그 때의 헌혈 릴레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매년 정기적으로 헌혈을 하고 있다. 이른바 나만의 헌혈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의 헌혈 일정은 매년 정해져 있다. 정확하게는 내가 정했다. 나와 가족에게 의미있는 달이다. 이를테면 첫째 아들의 생일이 있는 2월, 결혼기념일이 있는 5월, 둘째 아들의 생일이 있는 8월, 아내의 생일이 있는 10월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이다. 전혈을 할 수 있는 시간적 간격이 충분하다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이에 더해 올 해 또다른 헌혈 릴레이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해서 만든 커뮤니티의 회원들과 개인적으로 제작해서 발행하고 있는 뉴스레터인 <HRD Curator> 구독자분들이 대상이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올 11월에 개최예정인 재능기부형 컨퍼런스 <The Giver> 참가자들도 해당된다. 아울러 내년도 헌혈 릴레이도 기대된다. 그 때는 임관 30주년 기념행사가 있다. 나는 내가 이미 음미한 세 가지 맛을 다른 분들에게도 선사하고 싶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은 실천이다.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있거나 동참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면 머뭇거림은 사라지게 된다. 헌혈 릴레이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고 동참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헌혈을 하고 나면 팔뚝에 주사바늘 자국이 생긴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는다. 나는 이것을 사랑의 상처라고 부른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의 상처 하나쯤은 만들어보라고 권유하기도 한다.
수많은 점들이 모여 하나의 선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헌혈이 또다른 헌혈로 이어지는 순환이 이루어지면 길고 튼튼한 사랑의 끈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나에게는 헌혈 릴레이가 그 시작이고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