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1에 쓴 글)
4월 한 달간 사회적 거리두기와 관련된 논쟁이 있었다. 젊은 층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받았고, SNS에선 설전이 벌어졌으며, 한 축구선수의 글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봄이 만연하자 이동량이 늘어난 시기에 나온 다음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이 말하는 바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보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바보들은 참을성 없고,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무지하고, 이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인내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져올 희망, 이타심을 가지고 국가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 “국가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라는 국가주의식 명령은 이 그림에서 조금 이상하게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국가의 대응물은 의료진이며, 이 그림은 통제를 따르라는 직설적인 주장을 의료진의 노고에 대해 보답 하자라는 주장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이 국가와 의료진 사이의 묘한 전치를 풀어헤치면 다음과 같이 과격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해졌다. 의료진·국가는 의료진·국가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떠받들고 있으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왜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국가의 사회에 대한 보장이라는 복지의 이념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복지를 상징하는 그림들의 특징인 무언가를 떠받드는 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 그것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위 그림들은 국가주의와 복지의 이념을 넘어서는 것을 요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어떤 것을 국가사회주의라 말해보자. 이 이념은 국가가 사회를 위해 고생하니, 그 고생에 상응하는 행위를 사회가 국가에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국가와 사회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상부상조해야 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이렇다. 이 이념에서 국가는 사회에 이로운, 또는 이롭다고 추정되는 자유와 평등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며, 사회구성원들은 국가가 자신들에게 이로운 일을 해주니 국가에 원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 순진한 생각엔 문제가 있다. 국가가 자유를 보장하는 순간, 위 그림들처럼 사회구성원은 협조를 하지 않는다. 나라가 안전하게 만들어줬으니 꽃놀이를 하러 나가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국가가 사회구성원에게 협조를 강제하는 순간 그것은 국가사회주의가 꿈꾸는 상부상조를 없애는 꼴이다. 그렇다면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저 커플들을 향해 어떻게 해야 할까? 기껏해야 의료진이란 사회구성집단 중 한 집단을 국가의 대체물로 나타내어 사회구성원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것 밖에 더 있을까? 애당초 불가능한 국가의 권위와 사회의 자유·평등의 양립을 망상하는 이들은 문제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 논증은 "한국, 코로나19와 싸움서 민주주의의 힘 보여줘"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왜곡해서 사용하는 민주주의의 문제 또한 드러낼 수 있다. 민주주의가 보장한 민의 의지는 국가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게 아니라 민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꽃놀이를 하러 가는 거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한국에서 힘을 못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민주주의 외에 어떤 것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난 이 어떤 것을 공화주의라 칭하겠다. 이 이념은 공공선에 심혈을 기울이며, 이를 위해 민을 총괄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갖춘 전문가 겸 정책담당자들은 제도를 만들어 민을 관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당할 수 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교육을 통해 나타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구성원은 자연히 전문가의 의견을 따를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 자유의 제한이 문제가 될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이 이념은 국가와 사회의 상부상조를 꿈꾸는 국가사회주의보다 덜 이상적이고 더 현실적인 것 같긴 하다. 공화주의자들은 그렇게 유럽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반발과 시위를 비판하며, 위 그림들을 국가사회주의자들과는 다른 논지로 옹호한다.
하지만 공화주의의 논리에도 문제가 있다.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저 벚꽃 아래 커플과 같은 사람들이 꼭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화주의자들은 처음엔 이들에게 왜 전문가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지 설명한다. 상황이 여러분이 아는 것과 다르다고, 여러분이 뭘 모르는 거라고, 말을 듣지 않으면 전염병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라고. 이러한 노력이 성공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 실패한다. 그렇다면 공화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을 향해 무식하고 현실을 모른다고 욕하는 것과, 교육의 실패를 규탄하는 것 외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모르는 건 오히려 그들이라 볼 수 있다. 무식한 사람들은 공화주의를 위해 유식해져야 하는 게 아니다. 무식한 자들에 대한 전문가의 지적 우월을 논증하는 것, 당신들이 뭘 모르니까 우리가 나서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야 말로 공화주의가 원하는 통제와 관리의 정당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교육은 공화주의자들을 위해 무지를 타파하지 말고 재생산해야 하며, 무지한 자들은 교육의 실패작이 아니라 정상적인(?) 생산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관련된 논쟁에서 '공화주의vs전염병'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화주의vs민주주의'도 볼 수 있다. 전문가는 전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권위와 권위를 위한 자유의 제한과 불평등을 필요로 하지만, 민들은 국가의 권위를 무시하고 꽃놀이를 갈 수 있으며, 이 권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격렬하게 시위할 수도 있다. 이 민주주의 하에서 무정부적이고 반정부적인 힘, 국가에 대한 무관심과 국가에 대한 과한 관여는 전문가들이 국가 운영을 위해 필요로 하는 권위와 그에 따른 불평등을 부수고, 지식의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기 멋대로 하게 만든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난 지금 민중들이 권위적인 정부에 대항해야 한다는 민중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권위주의는 위에 있는 사람을, 민중주의는 아래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단 점에서 불평등에 기여한다. 그렇다고 난 절대적인 평등과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을 만큼 많이 엇나간 사람도 아니다. 분명히 코로나19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통제로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난 이 글에서 체계를 지향하는 힘과 해체적인 힘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려 했다. 결국 그 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라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전염병을 퍼트리는 잠재적 살인마라 비꼬는 이들이 제거하려 했던 민주주의를 구제하여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다행히 사태는 국가와 사회의 양립을 꿈꿨던 국가사회주의보단 낫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애당초 양립할 수 없고 그렇기에 서로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원초적인 불화는 위 그림들이 가리려 했던, 또는 의도치 않게 직시했던, 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 1항이 유발한, 우리의 가혹한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