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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와 누 May 14. 2020

일어나야 할 일-마틴 맥도나의 영화들에 관해

(2019년 여름에 쓴 글)

   마틴 맥도나의 영화에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킬러들의 도시(In Bruges)>(2008)에선 켄(브레단 글리스), 해리(랄프 파인즈)가 자살하고, <세븐 싸이코패스>(2012)에선 빌리(샘 록웰), 한스(크리스토퍼 월켄), 베트남 승려가 죽음을 택하며, <쓰리 빌보드>(2017)에선 윌러비 경찰서장(우디 해럴슨)이 외로이 방아쇠를 당긴다.

 그런데 이들의 자살은 신세 비관 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난 맥도나 영화의 자살이 일종의 당위와 연관되었으며, 이 당위를 위해 영화가 갖은 수를  쓴다고 본다. 즉 인물들의 자살은 당위에 따라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다. 이에 대해 말해보자.


1. 당위  

   먼저 <킬러들의 도시>와 <세븐 싸이코패스>에만 집중하도록 하겠다. <킬러들의 도시>에서 레이(콜린 파렐)는 아이를 죽여서 자살시도를 하고, 해리는 아이를 죽였다고 착각해 자살한다. 두 사람은 ‘아동살해자는 죽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공유하며 이를 이 영화의 당위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븐 싸이코패스>는 허구가 현실이, 현실이 허구가 되는 세상이고 여기서 인물들은 각본을 통해 세상을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려 고군분투한다. 영화 초반부에 <세븐 싸이코패스>라는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는 작가 마티(콜린 파렐)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 범죄스릴러는 지겨워. 총질하는 영화는 안 만들 거라고. 사랑과 평화를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어”라 말하며 우리가 보는 <세븐 싸이코패스>를 ‘사랑과 평화의 영화’로 만들려 하지만, 마티의 친구 빌리는 싸이코패스가 일곱 명이나 나오는 영화가 어떻게 사랑과 평화를 말하겠냐면서 <세븐 싸이코패스>를 "총질하는 영화"로 만들려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당위들은 ‘사랑과 평화의 영화’와 ‘총질하는 영화’이다.


2. 당위를 위하여-캐릭터

   그리고 맥도나는 당위를 위해 캐릭터를 배치한다. <킬러들의 도시>에는 해리가 있다. 킬러들의 보스인 그는 켄에게 아동살해자 레이를 죽이라고 명령하며 영화 전반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켄이 레이를 동정해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통보하자 해리는 갑자기 화면에 얼굴을 비추며, 삽시간에 영국에서 영화의 배경인 브리주로 온다. 그는 영화가 ‘아동살해자는 죽어야 한다’를 지키기 위해 스크린에 소환한 화신처럼 느껴지며 자신을―당위를 방해하는 이들을 거침없이 처단해간다.

 <세븐 싸이코패스>의 당위를 위한 캐릭터로는 우선 빌리가 있다. 그는 마티가 ‘사랑과 평화의 영화’를 위해 무언가 시도할 틈도 없이 ‘총질하는 영화’를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해나가며, 그 끝에서 억지로 자신의 죽음을 연출한다. 하지만 관객이 보는 <세븐 싸이코패스>는 ‘총질하는 영화’를 위한 이 결말로 맺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자살자인 한스와 베트남 승려는 마티가 <세븐 싸이코패스>를 '사랑과 평화의 영화'로 만들게 도와주며 마티는 자신의 각본을 완성한다.

     

3. 당위를 위하여-두 개의 영화

   <킬러들의 도시>와 <세븐 싸이코패스>는 당위를 위해 인물들만을 이용하지 않고 두 편의 영화를 오마주 한다. <킬러들의 도시>의 두 영화는 극중극으로 브리주에서 촬영 중인 영화가 오마주 하는 영화인 <쳐다보지 마라>(니콜라스 로에그, 1973)와 켄이 호텔 TV를 통해 보던 <악의 손길>(오손 웰즈, 1958)이다.

 <쳐다보지 마라>는 사고로 죽어버린 아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아버지가 결말에 아이를 가장한 마귀를 쫓다 살해당하는 내용이고, 영화의 배경인 베니스의 공간적 특징과 촬영·편집 기술을 이용한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어지러운 추격 신이 유명하다. 그렇다면 맥도나는 <킬러들의 도시>의 브리주를 <쳐다보지 마라>의 베니스처럼 만들어서 다시 한번 아동살해자의 죽음을 연출하려 한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브리주와 베니스는 다른 도시라는 점이다. 베니스에선 운하든 길이든 집이든 모두 좁거나 작아 미로와 현기증을 만들기 최적이지만, 브리주는 전통적인 중세도시답게 모든 것이 도시 중앙의 광장을 향한다. 브리주는 미로가 되기엔 너무 명쾌하다. 맥도나도 이를 수긍하듯 영화 후반부의 사건을 모두 광장에서 일어나게 만들지만, 동시에 베니스의 현기증과는 또 다른 브리주의 현기증을 개발하기 위해 <악의 손길> 결말의 다리 신이 공간을 구축하던 방식을 이용한다.

 맥도나는 <악의 손길> 후반부, 다리 위와 다리 아래를 번갈아 가면서 찍은 신에서 나타난 상하관계를 브리주의 종탑과 광장을 교차하는 신으로 옮긴다. 두 신 모두 위에선 부패한 어른들이 과거를 돌아보고, 아래에는 젊은이가 있으며, 어른 중 한 명은 아래의 젊은이의 존재를 알아채자 그를 죽이려 든다. 두 영화는 두 공간의 교차와 더불어 목소리가 두 공간 사이를 횡단하게 해 어지러움을 강화한다. 웰즈는 도청기가 다리 아래서 울려 다리 위까지 들리게 만들었다면, 맥도나는 조연이 종탑과 광장 사이의 계단에서 종탑에 있는 해리에게 레이가 살아있음을 알리게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브리주의 어지러움은 죽음으로, <쳐다보지 마라>의 방식으로 끝난다. 켄은 해리가 레이를 죽이러 종탑에서 광장으로 내려가자 광장에 있는 레이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종탑에서 투신자살한다. 이 투신자살은 나누어진 상하 공간과 공간에 따라 나뉜 사건들을 매듭짓고 영화를 해리와 레이의 추격전이 이어지게 만들며 그렇게 브리주는 아동살해자에게 악의를 품던 베니스를 닮게 된다.     

 <세븐 싸이코패스>의 당위를 위한 두 영화는 빌리의 대사와 몇몇 상황을 통해 오마주 된 <택시 드라이버>(마틴 스콜세지, 1976)와 빌리가 극장에서 보던 <그 남자 흉폭하다>(기타노 다케시, 1989)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폭력을 즐기고 영화 끝에 자기 파괴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총질하는 영화’를 추구하는 빌리에게 좋은 본보기이다. 빌리는 <그 남자 흉폭하다>의 아즈마(기타노 다케시)와 같이 무엇을 이루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충동적으로 폭력을 행하는, 또는 폭력 그 자체가 삶의 원동력인 남자처럼 보인다. 또한 빌리는 영화 끝에서 이상한 필연성을 느끼며 여동생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아즈마와 같이 자기파괴를 향한 필연성을 느끼며 죽는다.

 하지만 빌리는 아즈마만을 닮은 것은 아니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는 영화 내내 끊임없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변 사람을 끌어들이며 그 끝에는 비로소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자폐적 환상을 일구어 낸다. 그리고 빌리는 그를 닮아 '총질하는 영화'라는 명분 아래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며 이를 위해 주변 모두를 끌어들이는 동시에 그 끝에 자신 머릿속에만 있던 환상을 실현한다.


4. <킬러들의 도시>와 <세븐 싸이코패스>의 결말

   이제 우리는 두 영화의 자살자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해리와 레이의 추격전은 <쳐다보지 마라>를 오마주한 영화의 촬영장에서 멈춘다. 그리고 영화는 레이를 죽이기보단 잘 보고 배우라는 듯이, 자신이 아이를 죽였다고 생각하자 거침없이 자살하는 해리를, 일어나야 할 일을 보여준다. 레이는 절망에 빠지고 당위에 저항하기 위한 켄의 자살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빌리는 죽을 위기에 처해도 “괜찮아 잘 돼가고 있어”, “내 방식대로 끝낼 거야”라고 말하며 ‘총질하는 영화’를 위해 기꺼이 찰리(우디 해럴슨)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하지만 이후 총격전에서 살아남은 마티는 또 다른 자살자 한스가 남긴 녹음기를 재생한다. 그러자 한스의 내레이션과 함께 그가 생각한 <세븐 싸이코패스>의 결말, 싸이코패스4(베트남인 테러리스트)의 이야기가 화면에 잡힌다. 원래 이 이야기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베트남인이 전쟁 후 미국에 분노해 전쟁의 과오를 논하는 집회에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이야기였지만, 한스는 이를 베트남인 승려가 소신공양하기 직전에 꾼 호접몽으로 만든다. 우리는 다음 신에서 마티가 이 이야기를 토대로 <세븐 싸이코패스>를 완성하는 모습을 본다. 이 영화에선 자살이 필연적이다.


5. 남겨진 자들 

   당위는 절대적이며 그렇기에 인물들은 자살해야만 한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 두 영화에는 항상 일어나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자가, 자살하지 못한 남겨진 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킬러들의 도시>를 보자. 해리의 자살 후 총상을 입은 레이는 브리주의 병원으로 실려 가며 “여기서 죽으면 지옥 같을” 것이라 말한다. 그는 아동살해자를 죽이려 드는 브리주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실패했고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세븐 싸이코패스>의 진짜 끝(크레디트가 올라가다 필름이 불타더니, 마티와 싸이코패스5(재커라이어)의 통화가 나온다)을 보라. 재커라이어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마티를 당장 죽이러 가겠다고 협박하고 이에 마티는 차라리 잘 됐다는 듯이 “기다릴게요”라 말한다. 마티는 '사랑과 평화의 영화'를 위해 죽지 못한 자신을 비관하는 것일까.


6. <쓰리 빌보드>의 당위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살펴보지 않은 <쓰리 빌보드>는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우선 이 영화의 두 당위를 보자. 첫 번째 당위는 ‘공동체의 속죄’이다.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딸이 강간·살해당한 사건을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고 있지 않다 생각해 마을에 말썽을 피우고, 신부(神父)는 사태를 중재하러 영화 초반부에 그녀를 찾아온다. 신부와의 대화에서 밀드레드는 그를 자극하며 공동체의 책임을 말한다. “당신이 위층에서 담배 피우며 성경을 읽을 때, 아래층에서 다른 신부가 복사를 강간했다면 당신에게도 죄가 있어요”.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딸의 죽음에 대해 속죄하길 바란다.

 또 다른 당위는 ‘공동체의 질서회복’이다. 누군가가 공동체에 균열을 낸다면 당사자의 요구를 들어주든 억압하든 간에 사태를 잠잠하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으레 공동체를 다루는 영화가 그러듯 경찰이 공동체의 질서를 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7. 일어나야 할 일이 없다

   그렇다면 윌러비의 자살은, 그가 경찰서장이니 ‘공동체의 질서회복’을 위한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은 윌러비의 자살에 대한 책임을 밀드레드에게 전가하며 그녀를 옥죄니, 확실히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오히려 윌러비는 밀드레드에게 남긴 유서를 통해 자신의 자살이 밀드레드와 연관 없다고 밝힌다.

 난 이 말이 선의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생각한다. 그의 자살은 정말로 밀드레드, 나아가 '공동체의 질서회복'과 연관이 없다. 영화에 나오는 윌러비의 모습만을 보았을 때 그는 마을에 일어나는 문제 보단 당장 자신의 처지와 가족에 더 관심이 있으며, 이 둘을 생각해서 자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자살은 공동체와 관련되어 진행되던 영화의 흐름을 단절시켜버리고 그렇기에 관객은 그의 자살을 뜬금없다고 느낀다. 이 자살은 일어나야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앞선 영화들의 자살자들과는 다른 행태를 보였다 해도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쓰리 빌보드>에겐 경찰서 테러 신에서 당위를 이루기 위한 기회가 한 번 더 있었다. 밀드레드는 복수를 위해 아무도 없을 시간인 한밤중에 경찰서를 향해 화염병을 던진다. 하지만 경찰서 내부엔 하필이면 해고당한 경찰 딕슨(샘 록웰)이 윌러비의 유서를 읽으며 과오를 깨닫는 중이었고, 화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그는 일을 바로잡기 위해 밀드레드 딸의 사건 파일을 품에 안은 채 불길을 뚫어 탈출한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딕슨. 밀드레드는 이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후 딕슨은 병실에서 자신이 폭행했던 마을 주민 웰비에게 용서를 구하고 밀드레드의 성격은 차분해지며 둘은 반성의 시간을 갖는 듯하다. 그리고 퇴원한 딕슨은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남성이 범인이라 확신해 그의 DNA를 채취한 뒤 수사를 의뢰한다. 이제 범인이 잡히고 영화는 '공동체의 질서회복'이란 당위를 이룰 것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수수께끼의 남성은 범인이 아니었고 예상은 전복된다. <쓰리 빌보드>는 ‘공동체의 질서회복’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절망한 밀드레드와 딕슨은 어쨌든 수수께끼의 남성은 범죄자가 맞다며 그를 죽이러 마을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은 ‘공동체의 속죄’도 아니다. 단 둘이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을 처단하려는 것은 제대로 된 속죄가 아니다. 맥도나의 세계에서 당위들은 처음으로 실패한다.

 그런데 사실 우린 이 실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난 맥도나의 영화에서 당위가 이루어지기 위해 누군가가 자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질서회복'을 위해 경찰서 테러 신에서 누군가가 죽어야 했다. 그 누군가는 당연히 딕슨이다. 그가 각오하고 불길을 뚫었을 때, 그 결과는 화상이 아니라 희생이어야만 했다. 만약 그랬다면 밀드레드의 반성이 딕슨이 몰고 온 새로운 희망과 그 희망의 좌절로 인해 중단되지 않았을 것이며, 마침내 남겨진 밀드레드는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다시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려고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8. 떠나는 자들

   딕슨은 해리, 빌리, 한스, 승려처럼 자살하지 못했고 밀드레드는 레이, 마티처럼 남겨지지 못했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에서 자살하지 못한 자와 남겨지지 못한 자는 떠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앞선 맥도나 영화들과의 차이에서 유추해 보자면, 인용하는 영화가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맥도나가 그냥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다고 주장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이유는 생각하지 말고 벌어지는 일에 집중하자. 마지막 신에서 수수께끼의 남성을 정말로 죽일 거냐는 딕슨의 말에 밀드레드는 "가면서 생각하자"라고 답한다. 난 이 일어나야 할 일을 모르는 상태, 또는 마침내 모르게 된 상태가 마음에 든다. 당위들은 비로소 사라졌다. 맥도나의 영화들은 어떤 격변기에 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다음 작품에서 당위와 자살자들은 다시 등장할 것인가, 알 수 없다. 무조건적인 일어나야 할 일에서의 해방이라기 보단 언제든지 다시 당위가 존재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여행. 다른 영화에서 이런 해방감이 나타났다면 별 감흥이 없고, 심지어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걸핏하면 사람들이 자살해대는 맥도나의 영화에서 이러니 마음이 들뜬다. 그렇다면 마틴 맥도나의 다음 영화를 기대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맺어보자. 난 그들이 더 이상 자살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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