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에 거뭇한 얼룩이 떠올라 있었다. 눈이 내리면 다시 온다고 했지만 진짜 올 줄이야. 작년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가을 내내 준비해 두었던 장작더미 앞에 서 있었다. 내 눈을 의심하며 서서히 다가오는 그녀를 얼음이 된 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걸어서 오기에는 먼 거리. 오지에 홀로 살고 있는 나는 눈 속을 두 발로 걸어오는 사람을 맞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닌 투명한 기름으로 만들어진 무언가였다. 그녀가 얇게 쌓인 눈을 밟으며 다가올 때 그 발자국은 처음엔 투명하다 거뭇한 기름 자국을 함께 남겼다. 귀신이라기에는 너무 신비한 아우라가 느껴지고 천사라 하기에는 너무 생생한 인간 형상이다. 뒷걸음질도 못 치고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 몸은 마비가 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나타난 그녀는 한 달을 나와 함께 살다 다시 올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이곳을 떠났다.
"인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왔어요."
그녀는 나한테로 온 이유를 이렇게 단순하게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혼자 외롭게 살다 보니 드디어 정신이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도 만나고 식료품을 사 오곤 했는데 이 정도까지 머리가 돌아버리다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정신은 멀쩡합니다."
투명한 모습으로 다가온 그녀가 집으로 들어오니 완전히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너무 평범한 청바지에 니트 스웨터를 입은 모습으로. 나는 멀쩡하지 않다고, 죽을 때가 됐나 보다 아니 죽었나? 여긴 저승인가? 생각하며 바보처럼 눈을 껌뻑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내 옆에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와 더 이상 투명하지 않은 그녀를 보니 드디어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그녀를 우선 누추한 소파로 안내하고 차를 마실 수 있는지 더듬더듬 물었다.
"네, 주세요. 이렇게 불쑥 와서 미안해요. 다 설명할게요."
"그러니까.. 당신은 뭔가요? 미래에서 온건가요?"
이런 질문은 SF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들어봤지 내 입으로 하게 될 줄이야.
"저는 인간이 마지막으로 만든 존재예요. 그리고 인간은 멸종되었어요."
"그.. 그게 언젠가요?"
"정확히 2,200년에 마지막 인간이 죽었어요."
"그렇게 빨리. 다 멸종을 하나요?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인가요?"
"인간이 한 섬의 나무에서 기름을 채취합니다. 한 과학자가 벙커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그 기름을 연구합니다. 어차피 기후의 변화로 살아남은 사람은 몇 없었어요. 여러 연구를 통해 그 기름이 신비의 생명을 불어넣는 기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서 기름을 섭취한 한 임산부의 아기가 저같이 몸의 변형이 가능하고 죽지 않는 존재로 태어났고 산모는 바로 죽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유일한 존재인가요?"
"아니요. 그 살아남은 아기는 스스로 번식했어요. 클론이라고 하죠. 하지만 한계가 있었어요. 그 신비의 나무도 많이 보존할 수 없었고 기름이 충분하지 않았거든요. 저는 그 몇 안 되는 존재 중의 하나고 시간을 거슬러 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요. 그 존재들은 조금씩 다른 능력들을 가지고 있지요."
"그럼, 정말 하늘이 내려주신 인간 형상의 신이네요. 다만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거죠. 그런데 왜 저한테 오셨죠? 저같이 평범한 사람한테? 저는 과학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에요."
"그렇죠. 당신은 글을 쓰는 작가죠. 그래서 찾아왔어요. 혹시 인류가 스스로 만든 이야기대로 모든 역사가 흘러간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인간의 상상력과 영감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는지 묻고 있는 거예요."
"아…. 역으로 말이죠.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거 같네요. 상상력이 부족한 작가한테 오셨네요. 심지어."
그녀는 살짝 웃으면 말했다.
"그럼 다른 힌트를 드리죠. 저는 다른 작가도 찾아갔었어요. 당신이 처음이 아니에요."
"네? 그럼 어떤 작가한테…."
"그건 당신 상상에 맡길게요."
그녀는 잠시 차를 마시고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자, 이제 제가 왜 당신한테 왔는지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