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 책을 읽고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 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 <앵무새 죽이기> 책 본문 중
하퍼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 주인공 소녀 스카웃에게 아빠가 총을 사주면서 앵무새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다. 앵무새던 아니던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될 수 있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단순히 어떤 생명의 목숨을 끊는 것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책에서 말하는 앵무새는 흑인, 가난한 사람들, 어릴 적 실수로 인해 집 안에서만 지내게 된 이웃 그리고 속히 ‘평범’이나 ‘일반적인’ 부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유하고 있으며, 앵무새 죽이기란 앞서 말한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따른 폭력을 의미한다.
그들은 앵무새와 같이 실제로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싫어하고 기피하며 억측과 폭력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행한다. 빈부격차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경제 대공황 직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고 현재는 상당 부분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이 이야기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대상은 다르지만 여전히 편견적 시선과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여자 아이가 주인공이며,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며 독자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읽는 동안 아이의 순수함에 미소 지어졌다가 어른으로서 어떤 부끄러움에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나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해, 소설 속의 예를 들면, “깜둥이 애인이 무슨 뜻이에요? 왜 사람들은 아빠를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뜻을 이야기해 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말을 왜 쓰면 안 되는지, 다른 사람들은 왜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자신 없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그 보다 아이가 그런 세상을 진짜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뒤 돌아 빌게 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이 아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그런 일들이 없기를,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를. 아마도 그런 마음으로 주인공 아빠 애티커스 핀치는 흑인의 변호를 맡게 되지 않았을까.
이 소설이 매혹적인 것은 주인공 소녀의 순수함도 있지만 그의 아빠 애티커스 핀치라는 인물이 큰 역할을 한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식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는 떳떳함을 위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고, 질 줄 알면서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 우리는 그를 통해 진정한 어른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대해야 하는지, 진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애티커스 핀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나와 가까운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미국 경찰의 흑인 과잉 진압,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심심찮게 인터넷에 올라오는 갑질 사건, 끊임없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 및 직장 내 괴롭힘 등. 뉴스나 역사에서 혹은 인터넷상에서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하고 비난하며 처벌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만약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소설 속 독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잘못되었다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흑인 차별 재판에서는 (흑인의 명백한 무죄임에도) 백인의 편을 드는 게이츠 선생님(주인공의 학교 선생님)처럼 우리 역시 그러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내 주변 누군가가 차별적 언행이나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편견 없는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는가. 그러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런 적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인간이란 모두 모순적인 존재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멀리서 일어난 비극에는 슬퍼하고 분노하더라도 내게 일어난 일에는 쉽게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희망은 있다. 인간이기에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인간이기에 깨달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물론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뇐다면 안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이 내 가까운 곳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니면 내가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면, 세상은 조금씩 살아볼 만 해지지 않을까. 스카웃이 아빠를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 <앵무새 죽이기> 책 본문 중에서
아빠가 딸 스카웃에게 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