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공장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유행을 따라가기가 버겁기도 하다. 그런데 이젠 유행을 예측할 수도 없게 됐다. 말 그대로 새로운 것, 즉 평범하지 않은 것이 평범해지는 뉴 노멀 (New Normal) 시대라는 뜻이다.
근데 이 뉴 노멀 (New Normal) 이란 말, 왠지 낯설지 않다. 사실 말만 다르지, 결국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의 설렘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는 거다. 마치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져 버린 공장형 카페처럼 말이다.
이쯤에서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소개할 곳은 성수의 공장형 카페, 할아버지 공장이다.
입구에 간판도 없어 한참 찾았다. 외관부터 '나는 공장형 카페'라고 소리치는 이 곳. 사실 이 곳을 처음 봤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높은 천장, 사라진 기둥, 그대로 드러난 골조가 전형적인 공장형 카페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곳, 알고 보니 공장을 따라한 게 아닌 진짜 공장이었다. 그것도 오래전 염색공장으로 세워진 후, 17년간 자동차 공업사가 되기도 한 할아버지 공장.
사실 이 곳에 공장이 있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이곳은 성수니까.
60년 전, 땅 넓고 한강물을 얻기 좋은 곳에 위치한 성수는 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현상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거와 생산을 담당하는 준공업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면서 성수는 자연스레 많은 물건을 생산 및 보관할 대규모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성수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까지도 업종별 종사자 순위 중 1위가 제조업이고, 공장 용지 비율이 서울 전체 평균에 비해 약 20배 이상 높을 정도로 성수는 아직 현역 공업지역이다. 그렇기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성수에선 아직도 공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할아버지 공장처럼 말이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보통 공장 하면 떠오르는 재료는 저렴하면서도 튼튼한 철이나 벽돌 아닌가?
그런데 이 곳, 천장의 골조가 나무다. 천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구, 마당의 푸르른 나무들, 심지어는 나무로 만든 집까지. 이 곳을 이루는 대부분이 나무다. 대체 공장에 나무를 이렇게 많이 놓은 이유가 뭘까?
그 답을 듣기 위해 공장의 주인을 찾아보았다. 공장의 주인은 그 유명한 '대림창고'를 디자인한 홍동희 대표다.
지금은 공장형 카페 1세대인 대림창고로 유명한 그지만, 그는 사실 자연물의 질감을 살려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는 자연 소재는 인공소재와 달리, 시간이 가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친근해지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가깝고 편안하게 느낀다고 말한다.
실제로 산림과학원에 따르면 나무는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흡수하고, 초고음의 영역의 알파파를 발생시켜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만든다고 한다. 또한 나무의 향 속 ‘테르펜류’라는 성분은 '폼알데하이드'라는 유해성분까지 제거해준다 하니, 그의 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진 게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닌 듯하다.
공장임에도 왠지 모르게 편안했던 이유, 이제 알 것 같다. 나무로 대표되는 공장의 자연들은 공장의 차갑고 불편한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업무지구적 성격이 강한 성수에서 나무와 자연은 특유의 편안함을 통해 공간에 에너지를 제공하며, 이용자들로 하여금 쉼을 느끼게 해 주었다.
결국, 그가 맞았다. 나무는 공장을 공장답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역시 모든 휴식의 끝은 먹는 것이라 했던가. 나무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지니, 자연스레 음료가 먹고 싶어 졌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카운터에 음료를 주문하러 갔다.
그런데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간 카운터 위에서 이상한 무언가가 보인다. 나무가 얽혀 있는 모양이 신기하면서도 흥미롭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 만든 조형물인 듯하다.
자리로 돌아가던 중 또 하나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얼굴 모양의 조형물인 듯하다. 그제야 알았다. 예술품은 카운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2층을 비롯한 공장의 곳곳에는 많은 그림, 공예품, 출신지를 알 수 없는 조각상들이 있었다.
공장 속 예술품들을 보자니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공장 속 예술의 도시, 브루클린이다.
과거 뉴욕에서 가장 중요한 공업지대였지만, 산업시설들의 이전으로 유령도시가 된 브루클린. 그러한 브루클린은 1970년대 주변지역의 임대료 상승으로 인해 예술가들의 선택을 받게 된다. 그들은 '예술'이라는 도구로 빈공장과 창고들을 재탄생시켰고, 지금도 끊임없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예술이 경제를 계속 움직이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홍동희 대표도 할아버지 공장 안에 작은 브루클린을 만들고 싶었나 보다. 브루클린처럼 예술이 공간을 유지하고 활성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장소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매달 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받아 본인이 직접 검토하고, 이들의 작품을 한 달 주기로 전시했다. 또한 가끔씩 모두가 볼 수 있는 마당에서 공연을 열기도 하며,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다채로운 경험을 선사하였다.
흔히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라고 한다.
그러나 공간은 단순히 먹고 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계속 그 자리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다. 아무리 튼튼하고 영원할 것 같은 건물을 지어도 사람이 안 오고 죽어가는 공간은 결국 인간의 손으로 부서진다. 진짜 중요한 것은 '공간을 포장하는 것'이 아닌 '포장 속 내용물', 즉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다.
할아버지 공장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할아버지 공장은 그저 평범한 공장형 카페 중 하나로 남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건 나무로 친근함과 편안함을, 예술로 다채로움을 더해 사람들이 언제든 편하게 지속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굿플레이스가 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공장은 말한다.
뛰지 맙시다.
어차피 세상은 앞으로도 빠르게 변할 거고,
지금의 유행도 언젠가는 지루해질 테니.
할아버지 공장은 유행을 따라가기 바쁜 시대에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왔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곳은 빌딩 숲과 네온이 난무하는 서울 속에서, 성수의 흔적을 지키며 자신의 시대를 기다리는 뉴 노멀 (New Normal) 카페 할아버지 공장이다. 유행을 따라가는데 지쳤다면 이 곳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