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사람들이 사는 모습 엿보기
"아, 스웨덴으로 날아가고 싶네."
"너만 좋으면 당장에라도 와."
3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짐을 결정하고 아무래도 마음이 헛헛하여 멀리 있는 언니랑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언니가 살고 있는 스웨덴으로 날아가서 맑은 공기 속에서 기분 전환이나 하면 퍽 좋겠다는 생각에 한 마디 툭 던졌더니, 언니가 바로 오라고 한다. 재워주고 먹여주고 할 테니 비행기티켓만 사서 오라고.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스웨덴까지 왕복하는 데 70만원 밖에 하지 않는 저렴한 비행기 티켓을 찾아 길게 생각도 않고 결제해버렸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언니가 한국에 머물다 간지 얼마 안 되었기도 하고, 나도 딱히 스웨덴에 가고 싶던 것도 아니라서 올 겨울에 가네 내년 여름에 가네 하고 조율하던 것이 무색하게 덜컥 스웨덴으로 첫 걸음을 하게된 것이다. 자고 일어나서 가족들에게 다음 주 월요일에 스웨덴에 갈 거라고 말하니 엄마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던 게 기억난다. 프리랜서라고 하면서 반쯤 놀면서 지내고 있던 2018년 여름, 첫 유럽여행으로부터 2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날씨가 참 좋았던 8월 말, 처음으로 가본 스웨덴. 언니가 짝꿍 담담와 함께 살고 있는 곳. 10일 남짓의 나날을 보내며 나는 참 별 걸 하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정도 언니와 산책을 나가면 걸음걸음마다 보이는 푸른 들판과 동네 한 켠에서 만날 수 있는 당나귀와 닭, 토끼들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동화 속 풍경처럼 우거진 숲과 커다란 호수, 그 위에 떠있는 오리와 백조를 만났다. 그리고 삼시세끼 언니를 도와 열심히 밥이나 해먹다 보면 하루가 훅 지나갔다. 외식 물가가 비싸서 한국에서처럼 심심찮게 외식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이 나라에서, 이것저것 집밥이나 정성껏 만들어서 먹는 것이 큰 할 일이었는데 그게 꽤 재미있었다. 언니가 사는 동네는 스톡홀름 시티와 지하철로 15분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으면서도 시골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북적이는 도시에서만 살아온 나는 그 한가롭고 푸르른 풍경에 몸을 푹 담그고 '여기가 무릉도원이구나' 생각했다.
관광지 하나 가지 않고도 그 시골살이 같은 나날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언니가 날 위해 많은 만남을 준비해준 덕분이다. 언니는 직접 파티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수고를 무릅쓰면서 언니와 담담의 친구들을 불러 홈파티를 열어주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언니의 스웨덴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스웨덴에서 언니에게 가족과도 같은 친구인 N도 그날 처음 만났다.
나는 아직 영어로 길게 말을 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적극적으로 말을 하지 못했는데, 영어로 속사포 같이 말하고 농담도 주고 받는 언니를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N과 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어서 말을 하다보니 그런 대로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었다. 막 남자친구와 헤어진 터라, 앞으로 또 어느 세월에 잘 맞는 사람을 찾아서 인연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을 토로했었다. N은 지금의 남편과 처음에는 친구였다가 연인이 되고 결혼까지 이르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누군가를 만날 때 앞서서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데이트도 하고 섹스(?)도 하라며 거침없는 조언을 해주었다. 힘주어 말하던 Don't think too much. 지금 생각해도 참 맞는 말이다.
충동적으로 스웨덴행 비행기 티켓을 끊으면서 사실 걱정이 되었었다. 막상 가보니 역시 재미없어서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지면 어쩌지, 하고. 첫 유럽여행 때 그리 즐겁지 않았던 기억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스웨덴과의 첫 만남은 내 맘에 쏙 들었다. 그때까지 가본 모든 해외여행 중 단연 최고였다.
스웨덴에 자연 속에서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내며 복잡했던 마음을 후 불어버리고 돌아온 나는 언제든 스웨덴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겨울에라도 또 날아갈 듯 했지만 내 앞가림 하기도 급급하여 바쁘게 삶을 살다 보니 해가 넘어가 2019년이 되고,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프리랜서 노릇을 때려치고 스타트업의 마케터로 일하고 있던 나는 6월 중순에 이른 여름휴가를 겸하여 스웨덴으로 다시 날아갔다. 언니와 담담은 변함없이 그 곳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두번째 스웨덴 여행은 보름 정도를 머물렀다. 내가 가 있는 동안 운 좋게도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스웨덴의 기념일인 미드써머가 있었다. 스웨덴은 겨울이 한 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긴 데다가, 겨울 동안은 해가 짧고 어두워서 사람을 울적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에 보상하듯이 스웨덴의 여름날은 그야말로 파라다이스다. 한국처럼 푹푹 찌지 않으면서 햇살이 상냥하게 모든 야외 활동을 응원해주고, 테라스에서 늦게까지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밤 10시까지 하늘이 환하다. 그 여름이 시작되는 것을 온 마음을 다해 기뻐하는 날이 미드써머인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은 너른 잔디밭이 있는 공원에 모여 늘 부르는 노래에 맞추어 개구리 댄스를 추고, 젊은이들은 친구들과 술 마시며 파티를 즐기곤 한다.
미드써머날, 낮에는 담담과 함께 동네 공원에 나가 스웨덴의 부모들과 어린아이들이 세상 천진한 얼굴로 개구리 댄스를 흥겹게 따라추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엽고 행복해보여서 나도 그 대열에 뛰어들어가 함께 춤을 추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개구리 댄스보다 중요한 건 오후의 바베큐 파티였다. 담담과 언니와 나는 우리가 마실 술을 챙겨들고 담담의 친구가 바베큐 파티를 열기로 한 집으로 출발했다. 조금 더웠던 날, 20여분 정도를 열심히 걸어 도착한 집은 지하도 있고 2층도 있는 넓은 집은 심지어 바베큐를 해먹을 수 있는 큰 테라스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담담의 고등학교 친구들이었고, 언니는 담담의 파트너로서 초대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여동생인 나까지 달고 가도 괜찮은 걸까 싶었는데, 사전에 물어보고 그쪽에서 흔쾌히 오케이했다니까 뭐. 스웨덴은 친구들끼리 모여서 놀 때 각자의 파트너를 초대해서 커플로 노는 게 보통이고, '친구의 친구도 내 친구, 여자친구의 친구도 내 친구'의 느낌이라 문제 없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작정하고 커플 모임을 하면 모를까, 친구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연인이나 모르는 사람을 부르는 일은 잘 없기 때문에 이런 문화는 참 다르다고 느낀다. 물론 외부인인 내 입장에서는 빈 집에서 담담과 언니를 기다리는 대신 함께 바베큐 파티에 낄 수 있었으니 좋은 일이다.
다들 여자친구, 남자친구를 데려와서 다섯 커플 정도가 있었고, 애인 없이 혼자 온 건 나랑 다른 한 명 뿐이었다. (친구 모임도 이렇게 커플 위주라면 솔로로 살기 참 힘들겠다.) 이들의 친구도 아니고 친구의 파트너도 아닌데다 아시아에서 온 여행객에 불과한 나를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좀 어색하기도 했는데, 걱정할 필요 없이 모두 살갑고 친절했다. 우리는 모두 넓은 테라스에 둘러 앉아 소세지와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다양한 고기를 배불리 먹고,(베지테리언인 사람들은 준비해온 생선을 주섬주섬 꺼내 배를 채우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조용히 놀랐다.) 가져온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한참을 놀았다. 특별히 할 얘기가 많지도 않은 것 같은데 몇 시간이고 앉아서 끊임없이 나오는 디저트와 함께 도수가 높지 않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잔디밭 마당으로 나가서 나무토막을 땅에 세워놓고 막대기를 던져 쓰러뜨리는 놀이를 했다. 스웨덴의 오래된 놀이라던데, 너무 순수하고도 고전적이라서 한국식으로 하면 젊은 애들끼리 모여서 술 먹고 고무줄놀이라도 하는 걸 보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외국인인 언니와 나를 배려해서 대부분 영어로 대화를 나눠주고, 굴러온 돌인 나에게도 무척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다. 잠깐 들린 여행객에 지나지 않는 내가 스웨덴 사람들의 사적인 모임에 껴서 그들의 방식으로 미드써머를 함께 즐길 수 있었던 그 날은 지금도 꽤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미드써머가 저물고, 내 여행 기간도 마찬가지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미드써머가 명실공히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기억에 남을 듯 했다. 그런데 월요일 귀국을 앞둔 마지막 주말, 나의 많은 것을 바꿔놓을 중요한 사건이 불쑥 등장했다.
다음 이야기:
https://brunch.co.kr/@mimemy/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