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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 May 08. 2023

전업주부의 무게

왜 애덤스미스는 엄마의 노동을 경제비용에 포함하지 않은 걸까


비 내리는 어린이날이다. 십 분 전의 나는 홀로 카페에 앉아 잠시 눈물을 훔쳤다.

조금 전 백화점에서 뭔지 모를 뜨거운 것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수치심인지 모멸감인지 모를 그 감정은 어린 시절 엄마가 신었던 풀쓰레빠를 떠올리게 했다. 집을 나서는 순간이면 언제나 엄마발에 신겨져 있던 풀쓰레빠.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교회에 가는 단 하루, 몇 시간을 제외하고 늘 그걸 신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어린이날, 갑자기 월남치마에 풀쓰레빠가 떠오른다. 지금껏 심도 없던 엄마의 풀쓰레빠가 이제 와서 집요하게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가정의 달을 맞아 외출할 일이 잦았다. 활동적인 옷을 찾기 위해 옷장을 뒤지면서 입을만한 옷은 각각 5년 전, 3년 전에 구매한 티셔츠와 청바지임을 깨달았다. 엄마인 나는 우리 가정의 예산이 언제나 빠듯하다는 걸 잘 안다. 나 하나 참으면 모두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에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어린이날, 아이가 좋아할 만한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는 길. 같은 옷을 한번 더 꺼내 입으며 또 나오는 한숨에, 나는 밖에 나갈 일이 많지 않은 전업주부니까 이 정도는 감수하고도 씩씩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는 다르다. 남편은 직장으로, 아이는 학교로 외부활동이 잦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기분 좋게 들렀던 옷가게에서 남편은 본인의 바지만 사는 것이 어색했던지 내게도 바지를 하나 사라고 했다. 못 들은 척하고 아이의 티셔츠를 한 개 골랐다. 마치 그것만이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여성의류를 보게 되면 재빨리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고개를 돌렸다.


소비를 하는 순간이 오면 누군가 나는 우선순위에서 제일 마지막이라고 계속 속삭이는 것 같다.

남편이 필요한 옷가지와 신발까지 모두 사고 나면,

아이에게 맞는 옷과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고 나면,

먹을만한 음식과 누려야 할 문화생활을 다 하고 나면,

그러고도 돈이 남으면...

그때는 엄마의 차례가 오는 거라고 누가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아마도 빠듯한 우리 재정에 그런 순간이 오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고야 만다.


자기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통해 얼굴까지 올라왔다.

어쩌다 내가 이런 존재가 되었을까.

가정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내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래서 겉으로는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지만

하지만...

하지만...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어떠한 경제적인 대가도 돌려받을 수 없는 엄마라는 무한대의 자원봉사직을 자발적으로 지원했을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서럽다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 내가 원해서 여기까지 왔건만 나는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싱글이었던 내가 떠올랐다.

당시의 나는 주부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원해서'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를 건사하는 존재들이므로 당연히 본인이 선택한 삶에 책임을 지고 모든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때의 나는 따뜻한 가족 대신 차가운 직장을 선택했으므로 경제적인 자유를 얻은 것이고 따뜻한 가족을 선택한 그들은 가족애를 얻는 대신 경제적인 족쇄를 차는 것이라는 의견을 가감 없이 표출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생각이 옳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매 순간 행복하고 즐거운 건 인생이 아니다. 어떤 삶을 살든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마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전업주부로 살면서 삶이 어렵다고 느끼는 순간을 마주하는 건 직장생활이 어렵고 힘든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 삶이므로. 모든 것을 가진 삶은 좀처럼 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면 전업주부는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애당초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을 출산을 핑계로 잉여인력으로 만들고 가정 안에 자발적으로 매몰되어 남편에게 기대어 사는, 경제적인 이익추구는 포기한 존재인가?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에서도 느껴지듯 끝이 분명히 보이는, 길어야 이십 년 정도 엄마 곁에 머물러줄 자녀를 키우는 일에 푹 빠져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필수적인 자본을 거저 얻길 바라는 짐짝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출산과 동시에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능력이라도 부여받은 건가? 주부라는 그룹 안에 속하면 세월의 흐름과 무관하게 무엇이든 마르고 닳도록 사용하는 일이 불편하지도 힘들지도 않으며 남편과 아이만 밖에서 잘 지내주면 행복해지는 주술에라도 걸리는 건가? 주부는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는 존재인 건가? 그래서 항상 내가 설 곳이 이 세상에는 한 뼘도 없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매일 종종거리면서도 집에서 노느라 허송세월을 보낸다는 말을 듣는 걸까....


내 서러움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결혼과 출산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얻고도 나라는 존재까지 챙기고 싶어 하는 이기심을 분출하는 중인 건가. 단지 내가 욕심이 많아서 생기는 감정인 걸까.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어느 날, 우리 반 친구의 아버님이 사고로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다. 좁은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라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슬퍼했다. 그리고 친구의 어머님은 시장 한구석에 신발가게를 차리셨다. 그 신발가게의 매출을 올려주러 엄마와 함께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친구의 엄마는 내 신발값을 치르는 엄마에게 내 신발 외에 엄마의 신발을 하나 더 건네셨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엄마의 모든 권리는 자식인 나를 위해서 희생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산산이 깨 주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라는 역할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스스로의 권리를 잃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전업주부이기에 재정이 빠듯하고 모든 걸 희생하는 엄마도 사실은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소개로 정아은 님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이라는 책을 읽으며 비로소 내 서러움의 정체를 마주했다.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음에도 이토록 속이 후련한 것은 누군가가 내 노동력을 경제비용에 산정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주부인 나조차 간과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본주의사회도 굴러가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보살핌이 필요하다. 밥상을 차리고 치우며 따뜻한 잠자리를 봐주고 옷을 세탁하고 아픈 곳은 없는지, 힘든 일은 없는지 털어놓고 기댈 수 있는 쉴 곳이 되어주는,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언제든 달려가서 안길 수 있는 한 사람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의 근본은 자본주의원리의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욕망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이라는,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감정에 기초한 것이기에 경제가치를 매길 수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애덤스미스조차도 자신을 위해 저녁식사를 차려준 부인이나 엄마의 가치를 산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부당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단지 인간의 수많은 실수와 착오, 편견에 의한 결과물일 뿐이었다. 내 탓이 아니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내 권리를 스스로 찾는 일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가 아니라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 전업주부가 되었으며 정작 다시 사회로 돌아가는 순간이 되면 차갑게 외면받는 우리의 이야기를 떠들고 싶어졌다. 마음껏 떠들다 보면 방법이 생각나지 않을까. 솔직하게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엔 놀랍지만 그다음엔 해결책을 떠올리는 수많은 문제들처럼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아직 컴컴한 통로를 바라보는 듯한 마음이 들지만 조금은 희망이 생겼다. 그래서 기쁘다. 아무것도 없는 것과 실마리를 쥐고 있는 지금은 분명히 다르다.


 더는 내가 내 권리를 무시하고 짓밟지 않고 근거 있는 주장을 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받아주지 않는 냉정한 사회를 향해서 먼저 끝없는 질문들을 쏟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긴 연휴 동안 내 머릿속을 어지러이 괴롭히던 서러움의 꼬리, 혹은 깃털, 아니 발자국이라도 발견해서 참 다행이다. 조금은 더큰 용기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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