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핑크 Aug 24. 2023

아이의 학급임원선거  

임원 선거는 아이가 치르는 아이들의 수많은 리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어제는 아이의 학급임원선거날이었다.

문득 지난 1학기가 떠올랐다. 아이는 나름대로 준비해 간 연설 멘트에도 불구하고 다섯 표를 얻고 낙선했다.

아이들을 웃기기 위해서 각티슈까지 준비했는데 낙선했다는 소식에 슬쩍 힘이 빠지던 그날을 기억한다.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인기 있던 한 친구에게 몰표를 주었다고 했다. 우연의 일치로 거주 지역이 비슷한 아이들이 한 반에 배치되어 같은 유치원 출신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실패는 엄마에게 더 뼈아픈 것 같다. 마치 내 탓인 양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결과에 집중하기보다 과정을 떠올리며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나름대로 애를 썼다.

아이는 평소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임에도 스스로 출마를 결정하고 연설문도 적었다. 많은 친구들 앞에서 자신 있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름의 어필에도 성공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저녁밥상에서 남편의 어린 시절 반장이 되었던 경험담을 나누며 훈훈한 시간도 가졌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계속 '엄마인 내가 조금 더 사회성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만약 사람들 사이에서 소식통 역할을 하거나 코믹한 멘트를 날려서 분위기를 띄우는 존재였다면 아이가 '당선'의 기쁨을 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마음 한편에서 영원히 식지 않는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던 것 같다.


방학 중간에 한번 뵈었던 어머님들을 통해 개학 후 바로 다음날 학급 임원선거가 있을 거라는 소식은 우연히 미리 들었다. 더불어, 지난 학기 전학을 왔음에도 몰표를 받은 A의 성공담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A의 엄마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분이셨고 지난 학예회를 통해 아이에게 끼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특별한 비결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대에 차서 경험담을 청했고 곧 자세한 내용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비결이 전혀 특별하지가 않다.

A의 어머님은 그저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연설문 준비 담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뭔가 숨기려는 기색은 찾으래야 찾을 수도 없었다. 밝고 순수한 어머니와 아이의 준비 시간이 이야기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당혹스러웠다. '회장은 하늘에서 정해주는 것인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중 깨닫는 바가 있었다.



먼저,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정말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리고 연설문을 '스스로' 쓰고 싶은 대로 작성하게 했다. 공약은 원하는 것을 전부 적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만 적으라고 했다고 했다. 평소 정적이기보다 움직이며 하는 동적인 놀이를 훨씬 선호하던 아이는 하루에 한 번씩 반 친구들을 모두 웃겨주겠다는 호기로운 공약을 내세우며 특유의 장난기를 발동했던 모양이었다. 그 말을 전하는 엄마의 웃음끼 어린 모습과 말투에 어머님들도 웃어버렸으니 아이들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내가 기대했던 어떤 특별한 비결도 없었다. 그저 아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공약을 적었고 엄마는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 포인트를 두고 연설문을 암기시켰다. 그게 다였다. 엄마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 안되면 그만이라는 가벼운 마음의 세 박자가 존재할 뿐이었다. 어딘지 허탈했지만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2학기가 되고 개학식 다음날 회장선거를 한다는 안내문이 전달되었다.

아이는 나름의 공약을 만들어 연설문을 작성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연설문을 듣고 큰 소리로 연습만 시켰다.

웃음 포인트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저 편안히 아이가 쓰고 싶은 내용을 존중해 주었다.

아이가 적은 연설문이었기에 암기도 전혀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모든 준비가 그저 가볍고 쉬웠다.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 나는 나대로 시간을 보내며 투표는 잘하고 있을지 또 떨어지면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시간은 공평하게 흘렀고 곧 다가올 가을을 맞이하듯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하교 시간이 되었다. 꽤 거세진 비 앞에 몸을 숙여 장화를 갈아 신기는 내 앞에서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나 회장 못됐어." 세상에서 가장 아쉬운 얼굴을 하고 "어떡해... 괜찮아~~." 하며 더 해줄 말을 분주히 찾고 있었다. 곧이어 아이가 깜찍하게 말한다. "대신 부회장 됐어!" 나도 모르게 두 손의 엄지를 세워 엄지 척을 날렸다.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이어진 아이의 이야기는 더 흥미로웠다. 후보로 나선 친구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마술을 준비해 왔다고 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갔던 아이가 기가 죽었을까 걱정한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투를 재미있게 조금 바꿔 말함으로써 아이들을 웃겼다고 했다. 처음엔 많은 표가 나오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여덟 표를 받아 단 한표 차이로 아쉽게도 회장 대신 부회장에 당선되었다고 했다.


힘을 살짝 빼고 바라본 아이의 임원선거의 결과로는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과 없이 아이 혼자 충분히 잘 해내고 있는 사회생활의 결과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그 안에 엄마인 나의 힘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어딘지 후련하고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쏟아지는 비처럼 아이에게 쏟아질 삶의 기회도 무수히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엔 낙선이 아니라 기쁘기도 하지만 아이 혼자 오롯이 해낸 결과라는 생각에 더 즐겁다.

이제서야 간사하게도 삶에 무슨 비결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타고난 그 자체로 우리는 이미 매력이 가득한 존재임을,

다수의 재능과 약간의 노력이 박자를 맞추어 인생의 하모니를 선사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조금은 힘을 빼고 보내는 하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회장으로서 한 학기를 보낼 아이의 시간들을 지켜볼 수 있음이 참 감사한 아침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춘기 포비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