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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 Apr 29. 2024

육아휴직

육아는 휴직과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며칠 전 내렸던 비는 초여름 같던 날씨를 다시 봄으로 돌려놓았다.

반팔티셔츠 하나로도 충분했던 날씨가 딱 하루 만에 긴팔은 당연하고 점퍼까지 찾아 입게 되는 날씨가 되었다.

무심한 듯 계절의 경계를 지키고야 마는 자연을 마주할 때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나의 부피감을 느 된다.

눈앞의 현실에 순응하는 것을 첫 번째 규칙으로 삼아야 하는 약한 존재라는, 까맣고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 떠올린다.



출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갖기 전까지 잘하진 못해도 줄기차게 운동을 해왔기에 당연히 임신과 출산기간이 모두 순조로울 것으로만 기대했다.

하지만 심한 입덧은 6개월이나 지속되었으며 출산마저 자연분만에 실패했다.

그 모든 과정에 지금껏 내가 해온 노력은 1도 반영되는 것 같지 않았다.

바람 앞에 날리는 가을날의 나뭇잎처럼, 어느 날 바스락 하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에 좌지우지되는 중이었다.



조리원을 나오기까지는 그래도 문명이 나를 지탱해 줄 거라 믿었다.

내가 완성하지 못한 인생의 퍼즐들은 사회라는 집단 안에서 적당한 것이 뭔지 좌표를 알려주는 듯했다.

조용히 입 다물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그러고 나면 람답게 살 수 있는 보상이 뒤따랐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조용히 사람들에 의해 일구어진 사회 안에서 적응하고 뒤따르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육아휴직은 홀로 아기와 지내는 일이었다.

울음으로만 의사소통하는 아기의 입장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의논상대는 조리원에서 함께 지냈던 엄마들이나 인터넷 맘카페, 병원 정도였다.

남편은 일주일 내내 출장으로 거의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원시적인 환경에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뭐라도 먹으며 하루종일 씨름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이를 먼저 낳은 친구는 내게 느긋하게 하라고, 운다고 바로바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 했다.

하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는 사이렌소리보다 더 다급하게 들렸다. 점점 잦아드는 소리에 고막이 터질 듯했고 곧 숨이 넘어갈 것 같기도 했다.

누구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응해야만 평온을 신속하게 되찾을 수 있었다.

그날도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로 응가를 끝낸 아기의 엉덩이를 씻기러 들어가는 길이었다.

울음소리가 이제 내 고막 바로 앞에서 울리는 중이었기에 더 허둥대는 중이었나 보다.


"쿵!"


그만 머리를 화장실 입구 벽에 세게 부고 말았다.

순간 별이 보일 정도였으나 사이렌 같은 울음소리는 여전히 울리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괜찮아요?' 하는 목소리를 기대했음을 느꼈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새로 맡은 일을 알게 되었다.


'육아'라고 간단히 부르는, 이제 갓 세상에 발을 내딛는 미지의 존재의 의식주를 책임지고 그 성장을 지켜보는 과업을 시작한 거였다.

지금껏 해온 어떤 일보다 변수가 다양하며 다른 사람에 의한 대체조차 허락되지 않는, 완벽하게 준비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는 완벽과는 한참 거리를 둔 듯한 내 목소리에 반응하고 내가 안으면 울음을 멈추었다.

완전하지 않아도 엄마이므로 많은 과제들이 저절로 가능해질 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너는 할 수 있어.'


나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말하고 또 말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기띠를 하고 병원에 다니고 잠든 아기를 위해 이유식을 만들며 아직 아물지 못한 관절의 통증도 이겨내며 손빨래를 해댔다.

입덧과 난산으로 지친 내 몸은 제나 피곤했으며 손을 통과하지 않고는 입에 밥한술 떠 넣을 수 없었으므로 하루하루가 분기만 했다.

다양한 육아 조언들이 하루종일 유령처럼 내 곁을 맴돌았다.

그중 하나가 밤 10시부터 4시까지는 성장호르몬이 나오는 시간대라고, 반드시 10시 전에 재워야 한다는 얘기였다.

우연의 일치로 이제 생후 6개월이 되어가던 아기는 어지간해서는 잠들지 않는 잠투정을 시작한 상태였다.

9시부터 목욕을 시키고 노래를 하고 책을 읽어도 안되면 아이를 안고 거실 몇십 바퀴를 돌아도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아기를 재울 수 있다면 뭐라도 하려던 남편은 아기를 홀로 불 꺼진 방에 이십 분 정도 두고 저절로 잠들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당연히 찢어질듯한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들었다.



수많은 밤이 흐르고 이것저것 다 포기한 남편과 나는 아기가 잠들지 않을 것이 뻔히 보이는 시간이 되면 아기띠를 하고 겨울이라 추운 바깥산책을 시작했다.

내 품에 안긴 아기는 신기하게도 산책만 시작되면 스르르 잠들곤 했는데 그 이유는 '시원해져서'였다.

지나치게 아이의 건강을 염려했던 나는 따뜻한 실내에서 기모내복에 조끼까지 입혔던 것...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더워서 생긴 아토피를 발견하고서야 아이가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를 알아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무지했기에 용감했던 걸까.

내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통 아기에게 향해 있었고 지칠 줄 모르는 불꽃과 같기도 했다.  



아기의 변비문제가 생겼을 때도, 내가 노로바이러스에 걸려 모유수유를 할 수 없던 순간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여기저기 묻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일뿐이었다.

식스센스처럼, 오감을 통과하고도 결정되지 않는 무언가에 다다르면 감으로 답을 찍듯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짚어냈던 것 같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이 시작되며 모유수유를 끊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다.

출산 당시 69kg이었던 체중이 점차 줄어 57kg이 되었고 줄어든 체중만큼 복직의 그날도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휴직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아기는 이제 밥투정을 시작했다.

이유식에서 밥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못 견뎌해서 밥만 떠서 앞에 가져가면 통곡을 했는데 한번 울음이 터지면 누구도 말릴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되곤 했다.

잦은 설거지는 당연했고 온 집안에 밥풀이 난무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조그만 아기 앞에서 망연자실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뻤지만 그만큼 많은 고통들을 감내해야만 함을 조금씩 배웠던 것 같다.




그걸 사람들은 성장통이라고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성장통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회사로 돌아갔다.

아기는 이모님과 하루를 보내며 내가 돌아온 시간부터 필사적으로 잠들지 않거나 일찍 일어나는 일과를 보낸 후 내가 없는 낮에 깊이 자곤 했다.

그렇게 나는 휴직을 끝냈다.


'휴직' 말 그대로 일을 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육아휴직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돈을 버는 업무를 쉬고 무상으로 봉사하는 '육아'를 대신 시작한다는 의미 같다고 말한다면 비약일까?

국가에서 육아휴직기간 동안 지급했던 100만 원 남짓의 금액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기억한다.

모유수유를 해서 분유값이 안 들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 돈으로 내가 먹을 고기를 살 수 있어서 감사했던 일도 잊을 수 없을 거다.



하지만 퇴직을 하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육아휴직은 본게임 시작 전의 연습게임 같은 거였다.

복직은 끝이 아니라 워킹맘으로서, 아니 아이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에서 넘어야 할 수많은 허들 중의 첫 번째 관문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순진하게 이제 세상이 편안하게 나를 받아줄 거라 믿었다.

그 대가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어리석음만큼 큰 죄가 없음을 배워야만 했다.

육아가 거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지금껏 하던 대로 순진하게 적응하고 싶었으므로 그에 따라 파생된 숱한 관문들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조언해 줄 수 없는 나만의 정답이 있어야 함을 처절하게 깨달아야만 했다.


퇴직 6년 차가 된 지금도 나는 그 정답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저 나는 시험지가 아니라 사람이기에 그렇다는 것만 또렷하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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