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숙제로 매일 일기를 써야 했던 시절, 정신없이 뛰어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뉴스까지 다 본 다음 씻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야 생각났던 숙제들이 함께 했던 유년시절,
독서량은 없었지만 일기 쓰기는 좋아했던 꼬마는 열한 살 무렵에도 변함없이 일기를 적었다.
이불을 다 펴고 나면 발 디딜 틈도 없이 좁은 가게 단칸방, 꼭 쥐고 힘주어 채널을 돌려야만 했지만 때로는 발가락으로 채널 돌리기를 시전 하는 아빠를 보며 깔깔거렸던 '테레비' 바로 옆 자신의 잠자리에 엎드린 꼬마는 이제 갓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의 즐거움에 대해 종이에 구멍이 뚫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적고 있었다.
"다 크면 미스코리아 돼라."
공부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꼬마의 고모는 목욕이 끝날 무렵이면 그렇게 말하곤 했다.
키가 클 것 같으니 다 크면 미스코리아가 되라는 말이었는데 포동포동해서 '돼지'라는 소리까지 듣던 꼬마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다.
대답도 없이 머쓱하게 바라보는 아이를 보며 고모는 '무슨 말이든 좀 해라.' 하고 말한 뒤 다 씻은 꼬마를 꼭 안아주곤 했다.
그날의 일기 주제는 아마도 '장래희망'이 아니었을까.
꼬마는 일단 고모가 말했던 '미스코리아'를 떠올렸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어딘지 로버트 같은 미스코리아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일기장을 바라본다.
이내 요즘 열중하는 '피아노'를 떠올리고 만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에서 들었던 음들을 실제로 눌러보고 적응해 가는 과정은 그림을 그릴 때와 비슷했다.
갑자기 주변의 등이 모두 꺼지고 자신에게만 스폿라이트가 켜진 듯 피아노가 만드는 음을 조금도 틀리지 않기 위해 홀로 집중하는 순간,
혼자 이겨내야 하지만 전혀 외롭지 않은 오롯이 홀로 서는 그 순간이 좋았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말이었다.
"우리 아이는 피아니스트가 꿈이에요."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꼬마는 여러 번 반복해서 그 단어를 읊조렸다.
어딘지 멋지고 피아노 건반의 색깔처럼 검은색과 흰색이 잘 어울리는, 꼬마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직업이었다.
다시 일기장으로 돌아온 꼬마는 고사리 손을 꼼지락거리며 적기 시작했다.
"피아노데스크."
어느새 피아니스트는 우렁찬 뉴스 시작소리의 영향을 받아 뉴스데스크가 되어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 영어를 잘한다던 아빠에게 물어봤는지는 희미하다.
하지만 어쨌든 꼬마는 일기장에 적고 말았다. 피아노데스크가 되고 싶다고.
물비누라고 적힌 영어를 읽지 못한 까막눈의 엄마가 로션이라고 굳게 믿고 준 비누를 얼굴에 철퍼덕 바르고 '로션향 좋다~' 말하던 소녀는 한 바닥 가득 피아노가 좋다는 말과, 다정한 선생님의 칭찬을 자랑하며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적고는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커다란 피아노가 들어오기엔 너무 작은 단칸방을 외면한다.
사실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다고, 그냥 지금 사정이 생겨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