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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 Sep 23. 2024

추석연휴 마지막날의 부고 그리고 순수

애도와 위로는 산 자들이 해야할 몫임을 상기한다.

남편에게는 미국에서 오랜 유학 끝에 교수가 되어 정착한 친구가 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느라 바쁜 반면 그 친구는 아직 미혼이기에 입국하는 시기가 될 때면 언제나 친구들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돌린다.

그 덕분에 반쯤은 억지 춘향 같은 모드일지언정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쯤 남편은 친구들의 얼굴도 보고 사는 얘기도 들으며 삶을 나눌 수 있었다.

결혼 생활 십일 년 차에 접어들며 처음엔 짜증을 내던 나 역시 그의 친구들에게 조금씩 익숙해지던 터였다.

나이만 많았지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덩치 큰 친구, 부모님 눈에 탐탁지 않은 결혼상대로 인해 번번이 퇴짜를 맞던 약간의 염려가 함께하는 동생 같은 존재.

그게 그가 내게 준 이미지였다.


추석연휴 마지막 날 아침,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한가하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한참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남편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ㅇㅇ이 어머니 돌아가셨대."

부고였다.

오랜 기간 심장이 좋지 않아 고생하셨다는 남편의 설명이 뒤따랐다.

자식의 짝으로 알맞은 상대를 찾아주려고 고심하셨던 어머니.

얼굴 한번 못 뵈었지만 자식을 키우는 같은 부모의 입장이 되어 그 심정이 어떠셨을지 함께 걱정하게 되었다.  


돌아가실 것을 예감이라도 하신 듯 어머니는 추석에 고향인 완도에 내려가셨다고 했다.

호흡이 편치 못하셨기에 입원하고 싶어 하셨으나 병원에서 약을 복용하며 지켜보자는 말에 잠자코 따르셨다고 했다.

결국 일가친지분들과 오랜만에 반가운 인사를 나누셨던 날 밤, 호흡이 어려워져 응급실을 전전했으나 치료해 줄 전공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평소 꺼려하셨던 병원에서 임종을 맞으셔야 했다고 했다.

생명을 이어주던 심장의 박동과 폐의 호흡이 끊기며 어머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장지는 남쪽 끝에 위치한 완도가 되었다.


연휴 마지막 날 아침에 완도에서의 부고라...

다음날 출장까지 잡혀있던 남편에게 적당히 둘러대며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입술을 달싹이기를 수차례...

인근에 사는 남편의 친구는 이미 옷을 갖춰 입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누구보다 빠르고 담담하게 먼 길을 운전해서 가겠다고 선언하듯 말하는 그의 영향력은 컸다.


바로 다음 날 20주년 결혼기념일이라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했던 친구도,

맞벌이여서 아내의 눈치를 보던 친구도,

출장으로 왕복 대여섯 시간은 운전해야 할 남편도

결국 모두 그 길에 동참하게 되었다.

 

정장을 갖춰 입은 남편에게 이 길은 장례식 가는 길이 아니라 여행길이나 매한가지라고,

반바지에 슬리퍼로 입고 정장바지와 구두는 가서 갈아입으라고 했다.

반신반의하던 남편은 차에 타자마자 쾌적함을 느꼈던 것 같다.

첫 번째 친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남편의 조언에 따라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길을 떠났다.

오랜만에 뭉친 네 명의 중년은 잠 한숨 안 자고 수다로 긴 시간을 가득 채웠다고 했다.

편안한 차림을 제안한 내 칭찬도 한 수 거들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밤 12시가 되도록 도착하지 못하는 그에게 전화했을 때 수화기너머 "고마워요~ 제수씨!!" 하는 말을 전해 들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그는 왕복 열두 시간의 여정을 이동해서 친구 어머님의 마지막길을 배웅하고 돌아왔다.

새벽 한 시경에야 도착해서 잠자리에 드는 그의 인기척을 느꼈다.

한껏 충전된 그의 심장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피곤함 속에서도 그는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과 편안한 온기를 나눈 직후의 활기를 품고 있었다.

마치 십 대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그들의 순수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대학생이었던 어느 날에 있었던 부고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의 우리에게도 순수함이 있었다는 생각.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슬프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온다.

우리 모두에게 닥칠 사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슬픔에 잠기고 만다.

아직 팔십을 채우지 못한 어머님의 부고도, 새파랬던 이십 대였던 대학선배의 부고도 상처와 슬픔의 기억으로 존재함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해 본다.

그리고 살아있는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그들이 존재함을, 그로 인해 우리가 온기를 나눌 수 있음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부디 영면하시기를, 남은 가족에 대한 책임은 잊고 편히 쉬시기를,

살아있는 동안 좋은 사람으로 잘 살아내겠다고, 서로 격려하겠다고 약속드리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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