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고 문득 어떤 분이 보셨다는 드라마 닥터 차정숙을 봤다. 드라마 속의 차정숙은 시어머니 잘 모시고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똑똑한 의대출신 가정주부였다. 첫 장면부터 피부과 개업해서 잘 나가는 싱글 친구를 만나 기미제거받고 스스로의 사회적인 위치를 확인하는 모습이 보여 어딘지 가슴이 아파왔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시어머님께 매일 아침 신선한 야채주스를 갈아서 바치는 며느리, 큰 아이를 의대에 보내고 둘째의 꿈을 지지해 주는 사랑 많은 엄마, 주방 싱크대 문짝을 모두 떼어서 예쁘게 페인트칠까지 해서 교체할 수 있을 정도로 손재주 있는 사람... 차정숙은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 하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발병한 급성간염과 간이식의 과정에서 비로소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직면하게 되고 스스로의 인생을 찾기로 결심한다.
드라마를 통해 비록 나보다 훨씬 훌륭하긴 하지만 어쨌든 주부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엄마의 삶을 바라보고 나자 어딘지 우울해졌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지금의 이런 내 삶은 나중에 아이와 남편에게 좋았던 것으로 기억될까? 하루하루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를 이유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 맞는 걸까. 내 삶을 조금 유예시켜 둔 것이긴 하지만 아이가 크고 나면 내가 일을 할 수 있기는 할까. 어딘지 내게 절박함이 빠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번뿐인 삶, 한 번뿐인 시간을 사람 좋게 흘려보내면서 절박하게 애쓰지 않음으로 인해 후회할 순간들을 마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상상하는 걸 싫어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책은 언제나 실용서 위주로 빼어 들어 읽었다. 글을 쓸 때도 독후감이나 기행문 류의 글만 써보려 애썼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매일글쓰기를 통해 일기 같은 마음속 글쓰기가 머릿속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어준다는 걸, 나도 모르게 뇌를 일깨워 글을 쓰기 전까지는 하지 못했던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주부로 사는 삶에 대한 신세 한탄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았다면 지금은 그와 조금 다르게 '나에게 부여된 수많은 자아 중에서 내 이름 석자 앞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당당한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하찮게 여겨왔는지 조금씩 깨닫고 있다. 그 상처를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로 나는 나를 채근했던 것 같다.
얼마 전 글쓰기 모임에서 나는 스스로를 15년 동안 직장에 다녔으며 '생산'에만 치중했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사람들은 그 '생산'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했다. 생산직에 종사했느냐고 물으시는 분도 계셨다. 하하하... 내게 '생산'이란 주어진 일을 100퍼센트 완수하고 그에 해당하는 월급을 받아서 보람찬 마음을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님이 자영업을 하시면서 손발이 닳도록 일하고 나서야 생활비를 손에 쥐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랐기에 내게 돈은 두렵고 얻기 힘든 무엇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나를 온전히 바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했고 그로부터 받은 급여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삶이야말로 쓸모 있고 생산적인 삶이라 여겼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즉 마음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생산적인 삶이 되는 것이란 이 사회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므로 꿈은 꿔봤자 이루기 힘든 것이고 괜히 속만 상한다고 미리 체념하며 살았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달려온 삶이었다. '실패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한다'는 공식이 머릿속에 깔려있었다. 그러므로 실패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가장 안 좋은 변수를 깔고 그 위에서 스스로를 판단했기에 좋은 점수가 나올 리가 없었다. 무엇을 하든 그런 식이었다. 그러므로 보여지는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나를 얕보면 얕볼수록 나는 더 많이 노력해야 했고 밖으로 도출되는 결과는 좋았다. 그런데 요즘 그 알고리즘이 나를 갉아먹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수를 한번 하면 열 번 이상 나를 괴롭히는 알고리즘이 슬프게 느껴진다. 그 비슷한 모습의 누군가를 바라보면 도와주고 싶어 진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어, 온몸에 힘주고 버티지 않아도 가능한 일들이 생각보다 많아.'라고 말해주고 싶어 진다.
어제 늦잠을 잔 남편은 오늘 아침 몇 번이고 자다 깼다고 말했다. 평소 고민 없고 즐겁게만 보이는 그도 스스로를 채근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느꼈고 마음이 아팠다.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그도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루라도 빨리 나를 채찍질하는 수레바퀴 속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망설임 없이 다시 나를 밀어 넣어야 하는데 다른 한쪽의 내가 그러지 말라고 말린다. 돈도 잃고 마음도 잃는 상황이 올 수 있음을 알린다. 우리가 맞벌이를 하고 아이를 이모님께 맡겼을 때 그 약간의 여윳돈으로 인한 싸움을 상기시킨다.
요즘 영어수업을 하는 나는 어느 정도는 부담을 갖고 일하지만 대체로 즐겁다. 그리고 그렇기에 벌어들인 돈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비록 그 액수가 미미하고 나날이 늘어가는 내 보험금 액수를 충당하기에도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넉넉하다. 하지만 회사에서 관리직에 종사하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늘 자잘한 숫자들에 시달렸고 칭찬은커녕 욕먹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급여는 나의 주관적인 고통에 비해 형편없이 적었고 어떤 것도 나의 힘든 삶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렇게 벌어들인 내 돈은 누구에게든 쉽게 나눌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 자신에게조차 나누기가 아까운 귀중한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다시 먹고 싶지 않다. 처절하게 애쓰고 벌어들인 소박한 월급으로 유세를 떨고 온 집안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다. 내가 세상의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는 생각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내게 더 잘 맞고 조금은 여유 있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싶다. 내가 무능하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무능하니까 죽도록 나를 다그쳐야 한다는 생각은 그만두고 싶다. 또다른 나를 찾을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내 마음과 몸이 다함께 흡족하고 그 결과를 행복하게 나눌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행복해지고 싶다.
차정숙처럼 누가 봐도 머리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나대로 재능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이 볼 때 그다지 대단해 보이는 직장이나 사업체가 아니더라도 나는 나를 격려하며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가르치는 중이다. 여전히 순간순간 욱하고 화가 올라와서 습관처럼 나를 질책하지만 이제라도 삶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고 싶다. 드라마틱하게 본과시험에 합격해서 레지던트가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내 삶의 각도를 약간 틀어서 넉넉한 마음을 가질 기회는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도 나의 가치를 다시 떠올리며 내 이름 석자 앞에 당당해질 무언가를 찾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