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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 Sep 17. 2019

생각만 해도 설레는 단어, 퇴사.

남들처럼 나도 회사에서 짜치는 ('짜증 나고 지치는'의 줄임말- 회사 은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회사 조만간 때려치워야지"를 입에 습관처럼 달고 살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이 회사가 내 꿈의 직장까지는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좋은 회사는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짜 퇴사는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세계 어느 곳에 가서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알아봐 줄 만큼 이름 있는 회사, 내 가족의 삶까지 책임져주는 회사 (이 회사의 복지는 정말 우리나라 최고, 어쩌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한다)인 이곳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입사 후 정년까지 꾸준히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ex-회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답게, 변화해가는 트렌드에 앞장서고 있었다. 분기에 한 번씩 부서원들 모두가 문화생활 (덕분에 새로 개봉되는 영화를 다 볼 수 있었다)을 즐기러 가고, 팀원 사기 독려를 위한 파티도 종종 열어주었으며, 호칭을 자율화했고 (나는 이전 호칭이 입에 익어 퇴사할 때까지 바꾸지 못했지만, 신입사원들은 정말 부장님한테 00님이라고 불렀다), 40시간 자율 출퇴근제가 엄청나게 잘 정착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속해 있던 조직은, 제조업 기반의 경직된 문화를 깨고, 타 부서에 비해서 더 유연하게 운영되는 조직이었다. 어떤 형태의 휴직이건 눈치 보지 않고 (약간의 눈치는 있지만, 타사에 비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사용할 수 있었고, 실제 프로젝트 리딩을 직급이 아닌 능력에 따라 맡기는 경우가 많았으며, 회식은 저녁이 아닌 점심에 했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좋았다). 


나는 이렇게 좋은 회사를 왜 하필, 5년 차밖에 안되었을 때 그만두고 싶어졌을까?

퇴사를 결심했을 시기에는, 사실 정확히 왜 이렇게 퇴사를 하고 싶은지 명확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주변 사람들에게 퇴사 소식을 전하면서 조금씩 찾게 되었다.


퇴사 면접

부서에 공식적으로 퇴사 선언을 하고 나서 회사생활을 하며 인연이 닿았던 고마운 분들께 인사를 드렸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나의 (기쁘고도 두려운) 소식을 전했다. 이 만남들은 나에게 "퇴사 면접" 같았다. 왜 퇴사를 하고 싶은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퇴사 후 계획 등의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취업 면접 질문에는 다소 과장된 답변을 만들어내느라 (이때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내가 왜 이 회사에 취직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부족했던 반면, "퇴사 면접"은 나의 퇴사를 돌아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면접 질문 1. 왜 퇴사를 하고 싶은지

내가 회사에 너무 잘 적응해 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회사는 편안하고 안전했다. 그런데, 이 편안함 때문에 이대로 시간이 흘러 이 회사를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될 것 같았다. 지금처럼 지낸다면, 이대로 이 회사에서 정년을 맞이하게 될 것 같았다.


이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맞이하게 될 나의 미래는 고개만 돌리면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오른쪽에 앉아계신 과장님, 대각선 뒤편에 앉아계신 부장님, 경치 좋은 창가 자리에 앉아계신 상무님. 각각 (내가 노력한다면) 5년 후, (내가 많이 노력한다면) 10년 후, (내가 아주 많이 노력하고 운이 좋다면) 15년 후 나의 모습이었다. 여러 방면으로 배울 점이 많은 분들이었고, (회사는 직급과 상관없이 여전히 오기 싫은 곳이라고 하셨지만) 회사가 제공해주는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었다. 이렇게 나는 내 15년 후의 모습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다만,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미 모든 것이 짜여 있는 연극을 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내일이 오는 것이 설레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괴로워졌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이렇게 짜여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지도 모른다. 부양해야 할 자녀가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이 생각이 고개를 들었을 때 다행히 나는 아직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선택권이 없어지기 전에 다른 길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면접 질문 2.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회사 일이 너무 고되거나, 특정한 누군가가 나를 지속적이게 괴롭히거나, (가끔 이해 안 되는 일들이 있긴 했지만) 정말 말도 안 되게 답답한 회사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주 좋은 곳에서 이직 제안을 받은 것도, 나의 재능을 급작스럽게 발견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퇴사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고, 나의 퇴직일은 무한 연기되었다.


사람들이 내게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냐고 물었을 당시, 나도 계기가 없다고 생각했고, 없다고 답했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났다. 내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퇴사 하기 직전, 나는 부서원들과 해외출장을 갔었다. 비행기 안에서 세관신고서를 작성했는데, 직업 칸에 여느 때와 같이 Associate라고 적었다. 문득, 이 칸에 Associate 대신 Writer (혹은 Translator)이라고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한국에 돌아가면 빨리 퇴사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 칸에 평생 Associate라고 적게 될 것 같아서.


면접 질문 3. 퇴사 후 계획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에, 번역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눈을 떴다(입문반만 수강하고 눈을 떴다고 표현하기가 부끄럽긴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번역가가 되고 싶어 졌다. 목표는 내년 안에 내 이름이 박힌 번역서를 출판해서 수익을 내는 것. 이 외에도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 그중 하나 (브런치 작가 되기)는 감사하게도 퇴사 첫날 이루어졌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각만 해도 아찔한, 또 어떤 사람에게는 생각만 해도 설레는 단어, "퇴사".

퇴사가 설레는 단어일 때 퇴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Lucky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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