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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 Jun 23. 2020

"집에서 놀아요"

요즘 들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향한 안타까운 시선을 자주 느낀다. 내가 요즘 즐겨보는 미드 "모던 패밀리", 나름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각종 영화 및 소설에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전업주부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회의 시선이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집에서 일한다고 하면 "백수" 혹은 "집에서 논다", 조금 더 비관적인 관점에서는 "경제력이 없어서 남에게 의존하며 산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점은 '집에서 일하는 사람'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는 것이다.


우연히 이 주제를 다루는 것 같아보이는 팟캐스트를 발견했다. 팟캐스트는 도입부에서 여성 중에 번역가, 작가 등 실제로 일을 하고 있음에도 회사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서 '집에서 논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마저의 타이틀도 없는 전업주부의 경우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도입부를 듣고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아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내용이 이상해졌다. 여러가지 책을 인용하며 풀어가는 방식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정리가 덜 된 느낌이었다. 중반부는 '여자는 집에서 일하면 무시를 받으니, 무슨 일이 생겨도 회사에 계속 다녀야한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상한)근거를 중점적으로 다루다가, 갑자기 전업주부가 하는 일도 GDP에 포함시키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예상했던 내용이 아니긴 했지만, 생각해볼만한 주제를 몇가지 던져주었다.


집 vs. 회사

이 팟캐스트는 중반부에서 '집=일을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곳' vs. '회사=일을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곳'이라는 식의 흑백논리를 너무 극심하게 펼쳐서 전자에 속한 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는데, 실제로 우리 사회가 어느정도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 팟캐스트는 이런 사회적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바로잡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사고하고 있으니 무조건 회사에서 버텨라 라는 충격적인 조언을 한다. 여성이 회사에 가야하는 이유 중 하나로 "대한민국의 여성이라면 결혼 후 남편쪽 '확대가족'과 관련된 가사를 맡게 되기 마련인데, 이를 피하고 싶을 때 회사를 가야한다는 핑계는 좋은 핑계가 된다'라는 근거를 들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렇게 말했는지는 알겠지만, 우선 회사를 가야해서 시가의 가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말은 팟캐스트의 말 그대로 '핑계'일 뿐, 부당한 시가의 가사를 근본적으로 없애주는 핵심적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부당하지 않은 시가의 가사는 회사에 가야한다는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잘 조율해서 함께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엄마는 왜 일을 안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여자가 경제적으로 독립해야한다는 부분, 회사에서 일하는 걸 좋아하는데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육아를 위해서 퇴사하는 것은 지양해야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팟캐스트에서 회사에 가야만 일에서 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딸을 둔 엄마의 경우에는 딸에게 롤모델을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회사에 꼭 다녀야한다고 한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우선,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취감이 없는 일인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하는 일이라고 무조건 성취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나의 경우에는, 지금 집에서 하는 일에서 회사에서 했던 일보다 훨씬 큰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 아직 나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엄마가 차려 입고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만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라고 생각한다. 팟캐스트에서는 아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아이로부터 "엄마는 왜 일을 안해?"라는 질문을 받게 되고, 이럴 때 전업주부는 할말이 없어진다고 한다. 응? 이 '절호의 기회'를 통해 '내 일(가사 노동이건, 번역이건, 글쓰기건)' 을 딸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저런 질문을 아이에게 받았을 때 쭈뼛쭈뼛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넘기면, 그 아이는 "집에서 하는 일은 일이 아니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마음 속에 품은 또 하나의 사회 일원으로 자라날 것이다. 나의 친정엄마는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속에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오셨다. 나는 엄마의 일을 존중하고, 여자 (혹은 남자)가 전업주부를 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거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 엄마는 나에게 전업주부란 집이라는 하나의 조직을 운영하는 팀원이라고 했다. 회사에 재무팀, 영업팀, 사업팀, 인사팀 등이 있듯, 집에도 그런 역할이 나누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아빠는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영업팀 및 사업팀의 역할을 하고 엄마는 그 돈을 투자하고 관리하는 재무팀 및 조직원을 관리하는 인사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어릴 적부터 단 한번도 엄마가 '집에서 논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전업주부의 은퇴

팟캐스트에서는 생각보다 아이들이 엄마를 필요로하는 시기가 그렇게 길지 않고, 그 시기가 지나면 공허해지기 때문에 회사에 나가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회사를 다녀도 은퇴시기가 오듯, 아이가 독립하면 전업주부의 은퇴 시기가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회사원들이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듯, 전업주부도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아는 분의 어머니는 전업주부로 생활하시다가 자녀들이 독립한 뒤, 오래전부터 꿈꾸어오셨던 '화가'라는 직업으로 제2의 삶을 살고 계시다. 자녀가 떠난 방을 작업실로 리모델링하고 작업한 그림을 모아 전시회까지 개최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부터 내 일을 존중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노고를 인정받을 수 있다. 스스로도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바란다면 그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 아닐까.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에게 회사에서 끝까지 버티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심지어 우리가 열렬히 준비하고 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재택근무의 시대'인걸.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전업주부의 분류를 '주부' 혹은 '무직'이 아니라 '재택근무자' 로 바꾸면 어떨까. 전업주부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집에서 놀아요." 라는 대답 대신 "재택근무해요." 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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