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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Jul 26. 2022

슬픔의 총량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생의 고독을 새긴 조각가 『여기, 카미유 클로델』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카미유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여성의 역할이 가정에서의 헌신이 최고 미덕이었던 19세기에 조각가로 인정받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분투했을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여성이라는 사실만이 유일한 아킬레스건이었던 프랑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 예술가들의 집결지인 파리에서 카미유가 로댕을 만나는 건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을 것이다. 나이 어린 젊은 여성이라는 세간의 시선 앞에 당당히 조각가로서 인정받고자 했던 카미유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이미 조각가로서 명성을 가진 로댕과의 대화에서도 물러섬 없이 당당했다. 카미유의 빛나는 눈을, 조각을 향한 열정을 그녀의 작품 속 분출하는 에너지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카미유에게 빠져들었을 것이다. 로댕도 예외는 아니었다.


 카미유와 로댕은 수많은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완성한 작품은 로댕의 이름으로만 남겨졌기 때문에 어디부터 어디까지 카미유가 작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분이 무의미할 만큼 둘은 한 몸이 되어 조각상을 완성했다. 카미유는 로댕을 존경했지만, 로댕의 아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적지 않은 로댕의 작품을 작업하면서도 각종 살롱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한 이유다. 카미유의 조각상은 로댕의 조각상보다 부드럽고 유연했다. 또한 그녀의 작품에는 “금지된 꿈으로 가득 찬 내면을 최초로 표현한 조각가”라고 칭할 정도로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만의 에너지가 있었다.


 로댕은 카미유의 영혼을 탐미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했지만, 카미유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약속도 앞으로 어떤 여성도 모델로 세우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로댕은 서서히 멀어졌고 카미유는 영혼에 상처를 입었다. 카미유가 임신했었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녀가 잠시 떠나 있었던 것과 사진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연인의 배반은 카미유가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영혼의 숲길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로댕과의 이별 후 둘을 둘러싼 추문에 로댕은 침묵했고 카미유는 직접 맞섰다. 늙은 여인이 나이 든 남자를 끌고 가고 그 뒤로 젊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 매달리는 모습이 담긴 조각상 <성숙의 시대>는 로댕과 카미유의 관계를 설명하는 작품이었다. 카미유가 증언의 방식으로 선택한 조각은 결국 그녀를 더 큰 고통 속으로 끌고 갔지만 <성숙의 시대>가 아니었다면 세상이 그녀를 기억할 수 있었을까.


 ‘예술이 자기 자신의 비밀에 맞설 때 가장 활기차고 위험해질 것임을 카미유는 알고 있었다. <성숙의 시대>는 바로 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욕망과 질투, 상실과 배신 사이에서 그녀의 연약한 삶이 찢기고 있음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사랑과 운명에 대해 여러 겹의 의미와 질문을 던지는 조각상은 보이는 그대로의 그녀 인생을 대변했다. ‘이 작품은 로댕 당신이 나를 기억하도록 나중까지 남겨질 가장 확실한 것이 되겠죠.’ 그녀는 이 작품이 삶에서도 사랑에서도 기념비적인 존재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p.66)’


 카미유는 로댕과의 관계가 끝난 후 서서히 영혼의 빛을 잃어 갔다. 그녀가 조각으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고 그녀의 어머니에게까지 외면받았다. 어머니는 카미유로 인해 작은딸에게 해가 미칠까 염려했고 카미유를 아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를 정신병원에 수감시켰다. 그녀가 쓴 편지는 병원 밖을 나서지 못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카미유는 점점 세상으로부터 멀어졌다.


 카미유는 병원에서 절대로 오지 않을 이들을 기다렸다. 로댕을 기다렸고 동생 폴 클로델을 기다렸고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너에게 닥친 모든 불행은 어쩌다 보니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그러니 너의 책임이 아니라고….’ 가만히 등을 쓸어 줄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렸지만,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카미유가 오랜 시간 기다렸던 어머니가 한 번이라도 그녀를 안아 줬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누군가를 미워하고 의심하면서 세상과 멀어지지 않았을 텐데. 어떤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가슴을 맞대고 믿어줄” 이가 있었다면 그녀의 삶과 사랑, 예술은 멈추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지 않았을까.


 시인의 눈으로 해석한 카미유 클로델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드라마 같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아리고 아파서 그녀가 느낀 고통의 감정이 내게도 밀려오는 듯하다. 카미유 클로델의 생애를 읽으면서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이 생각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교통사고보다 남편을 만나게 된 게 더 큰 고통이었다고 말했던 프리다 칼로, ‘여자도 사람 이외다’를 외쳤지만 가족과 철저히 고립된 채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나혜석, 빈 껍데기만 남은 채 영혼은 이미 꺼져버린 카미유 클로델. 정신병원에서 사망해 지금은 어디에 묻혔는지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지만, 긴 세월이 흘러 그녀의 생애와 작품을 다시 조명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시인은 ‘어떤 것이든 진실하게 창조된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공통된 감정 상태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첫 번째 슬픔을 나눈 사이. 카미유 클로델의 첫 번째 슬픔을 시인의 눈을 통해 만났고 나에게도 그녀가 느꼈을 깊은 슬픔과 고통이 새겨졌다. <성숙의 시대>, <애원하는 여인>보다 벽난로에 지친 몸을 기대고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이 조각된 <벽난로가에서의 꿈>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건 그녀의 지친 내면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내면 아이가 느껴져서 일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그리워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의 고독을 새긴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 그녀의 슬픔을 나눠 가지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슬픔의 총량이 아무리 무거울 지라그것을 나눠가진 이들이 많아지면 슬픔의 무게는 가벼워질 테니까.


카미유 클로델
<중년 혹은 성숙의 시대>
<벽난로가에서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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