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주변에서 종종 듣곤 했던 얘기가 '개룡남'은 싫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자기가 잘 나서 성공한 줄 알아 '싸가지'가 없다고 종종 이야기 했던 것 같고, 여자친구들은 이기적이며 성공에만 관심 있고 배려심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꼽았던 것 같다. 실제 가정배경이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이 좀 더 감수성이 풍부하고 배려심이 높다는 것은 기존 연구에서도 밝혀진 바 있다.
'필요로부터의 거리(dissociation from necessity)' 라는 개념은 Bourdieu가 구별짓기(1984)에서 언급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소득은 필요로부터의 거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구수입이 유년기부터 각각의 조건에 맞는 취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Bourdieu는 사치취향과 필요취향을 구분하는데, 사치취향은 "필요로부터의 거리, 자유, 또는 자본소유가 보장해주는 용이함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조건의 산물"이며 필요취향은 "필요의 산물로 바로 그 필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본모습을 들어낸다." Bourdieu가 필요취향의 양식으로 설명한 부분을 몇 가지 살펴보면 "이들은 휴식을 즐기는 법을 모르며, 항상 무슨 일을 해야하고, 문화적 대량생산의 전문가에 의해 날조되어 규격품이 된 여가활동에 모든 것을 맡긴다." 그에 따르면, 필요취향은 신체 속까지 새겨진 일종의 낙인이다.
하단의 그림은 Bourdieu의 이론을 독일 사례에 적용한 Blasius & Friedrichs (2008) 에서 발췌한 것인데, 문화자본(cultural capital)과 경제자본(economic capita) 수준에 따라 가구 및 옷차림에 대한 선호가 상이함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하단의 분석은 하류계층만을 대상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자본 수준이 높을 경우 스타일리시 가구 등을(fstylish) 골동품 상인에게 구입하는 경향이 있으며(sad) 세련되고 우아한 옷차림 또한 선호하는 것을(cchic) 확인할 수 있다. 반면, 경제자본 수준이 낮은 경우 집에 초대할 손님이 없다거나(mnog), 단순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선호하거나(ccorrect), 청소하기 쉬운 가구 등을(feasy) 백화점에서 구매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sds).
국내의 경우, Choi(2013)가 2010년 자료를 사용하여 사회계급에 따른 문화취향을 분석한 바 있다. 하단의 그림을 보면 상류층(upper)은 클래식이나 오페라 장르를, 중산층(middle)은 영화, 대중음악, 사진촬영 등을, 하류층은 팝 댄스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러한 취향의 차이가 개인의 사회자본 구축과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예컨대, Bourdieu 자신이 그러했듯이 클래식과 오페라 음악을 즐기는 학교 동료들 사이에서 느꼈던 박탈감과 소외감이 그를 더 연구에 매진하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여유과 배려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오늘 한국의 개룡남에게서 투박함과 이기심이 느껴진다면 그것 또한 부분적으로 필요취향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런데 한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제는 노동시장에서도 '가난혐오'가 횡행하고 있는 듯하다. 가난을 극복했다는 것이 전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과거를 부정하고 숨겨야 하며, 주변사람들에게 어울릴 만한 그럴듯한 취향을 갖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가난한 이들의 처치에 대한 일말의 고려조차 없는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가정배경이 풍족한 아이들은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설 수 있는 가정 차원의 물질적, 정서적 지원이 뒷받침 되어 있다. 열악한 사회적 지원 속에, 경쟁에서 낙오될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이해와 공감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력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업무수행능력을 중심으로 구직자들을 선별했다면, 지금은 ‘오버스펙’ 인재가 노동시장에 넘쳐 나다보니 업무수행 능력이외의 다양한 정의적 특성들 (예컨대, 협동심이나 배려심) 등이 구직자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비등한 실력에 성격이 둥글고 모나지 않은 구직자들이 넘쳐나는데 굳이 '가난한 향기'가 나는 구직자를 뽑을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면 흙수저 출신의 구직자들은 이제 환골탈태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개천에서 자라왔던 사람들은 이제 생존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 이외에도 필요취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고의 노력 또한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정하고 변개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렇게 애써 취득한 상징과 자본으로 또 다른 위계와 차별을 만들어내고 자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노력과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 가난을 혐오하기 전에, 개천에서 자라나도 배려심과 감수성을 갖춘 인재를 키울 수 있는 사회를 꿈꾸어보면 안 되는 걸까?
참고문헌
Bourdieu, P. (1984). (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최종철 역, 2005, 구별짓기 (상)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새물결).
Blasius, J., & Friedrichs, J. (2008). Lifestyles in distressed neighborhoods: A test of bourdieu's 'taste of necessity' hypothesis. Poetics: Journal of Empirical Research on Culture, the Media and the Arts, 36(1), 24.
Choi, S. (2013). Class and cultural hierarchy of south korean society: Focusing on tastes in cultural activities. 한국사회학, 47(6),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