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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앤라라 Oct 28. 2021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다

마음의 자리_이별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당신에게

‘머뭇거리다’

나이가 들면 어떤 일을 하든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행동에 앞서 생각이 많아지는 탓이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확실히 더디고 무디어진다. 감정 자체가 무디어지는 것은 아닌데 행동을 할 때 조심스럽다. 

다가가도 될까, 믿어도 될까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유도 있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걸음이 느려진다. 혹여나 내가 내딛은 한 걸음이 상대를 두 걸음 물러서게 할까봐. 


H와의 헤어짐 이후 다음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는 걸음걸음이 무거워서 자꾸 주저앉았다. 뭐든 열정적이던 20대가 아닌 탓이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나이 탓만은 아니었다. 


환영처럼 떠오르는 지난 추억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여전히 내 안에 살고 있는 H를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그건 사랑이 남아서라기보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과 죄책감이었다.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때로는 걸음을 멈추게 만들기도, 때로는 관계를 어긋나게 만들기도 했다.  




I는 종종 머뭇거리는 이유를 물었다. 그때마다 별일 아니라고 무마했으나, 지속된 물음에 결국은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함에 무모함이 더해진 결과가 얼마나 참혹할 수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였다. 연인 사이에는 끝까지 침묵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무겁게 짓누르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던 욕심이 상대를 얼마만큼 괴롭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지나친 솔직함이 상대에겐 무차별적인 폭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거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1년의 연애 기간 동안 H는 시도때도 없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의 사소한 감정 변화에도, 바빠진 업무에도, 갑자기 생긴 친구와의 약속에도 I는 H를 떠올렸다. 그렇게 조바심과 집착으로 얼룩진 관계는 서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I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준비 없는 이별이 당혹감으로 다가오듯 준비 없이 시작된 사랑도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때 나는 외로움을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해 서둘러 연애를 시작해서는 안됐다. H와의 이별을 천천히 둘러보고 음미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렇게 다시 사랑한 준비가 됐을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했던 거다. 그때 I가 내게 보였던 행동들이 내게는 지나친 집착처럼 느껴졌으나 I에겐 절실함이었고 불안함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조금 더 따뜻하게 손을 잡아줬을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외로움이라는 건 당연한 감정이다.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아도, 온전한 나만의 가족이 생겨도 때때로 외로움이 찾아온다. 그러니 혼자가 두려워 서둘러 누군가를 옆자리에 두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으로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이제는 안다. 


어쩌면 외로움을 온전히 자기 감정으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을지 모른다. 늘 ‘좋은 사람’과의 연애를 꿈꾸는데, 좋은 사람이란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내가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고, 좋은 감정을 나누고, 따뜻함을 줄 때 상대는 내 옆에서 빛나는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을 찾아 방황하기 보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주는 것, 성숙한 연애의 시작이다. 


사랑을 온전히 느끼면서 행복했듯 이별도 온전히 느끼면서 그 안에서 내가 몰랐던 나를, 나의 감정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이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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