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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앤라라 Nov 16. 2021

마음이 지치는 연애

마음의 자리_연인과의 잦은 다툼으로 힘든 당신에게


‘좋은 사람’


길을 걷다가 익숙한 노랫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어느 한 시절, 함께 들었던 노래는 때때로 그리운 추억이 되고는 한다. 그가 그립다기보다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서 잠시 추억에 젖는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상대가 원하는 모습에 맞춰서 나를 바꾸기도 하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기 위해 기꺼이 나를 버리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맞춰가는 과정은 기분 좋은 긴장과 설렘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낯섦의 정도가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라면 그 자체가 다툼의 원인이 된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양 극단에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설렘이 아니라 고통이다. 특히 스스로 온전히 홀로 서지 못했을 때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나를 맞춰야 하는 과정은 끊임없이 나를 잃는 과정이기도 하다. 


K와는 시작부터 불꽃이 튀길 정도로 좋았는데, 이상하게 다툼이 잦았다. 좋은 날이 ‘너무’ 좋았다면, 나쁜 날도 ‘너무’ 나빴던 게 문제였다. 살면서 누구와 크게 소리내 싸운 적이 없었는데 K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퉜다. 나중에는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둘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싸우고 화해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당시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선배는 나를 ‘급격히 시들어가는 꽃’에 비유했다. K와 만남을 지속할수록 나를 잃어갔고 서서히 무채색의 인간이 되어갔다. 완전히 생기를 잃고 말라버린 꽃과 같았다. 꽃이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말라 비틀어져 가고 있다는 선배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감정이 밑바닥을 칠 때까지 사람이 희미해질 때까지 다투면서도 헤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매일같이 싸우면서도 K와 1년 반을 만났다. 30대의 연애였으니, 1년 반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 다툼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나는 늘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가 나를 괴롭히는 방법을 선택했던 거다. 




돌이켜보면 K는 나의 생활을 철저히 통제하고 싶어했다. 출근을 제외한 모든 외출을 싫어했고, 야근하는 것도 , 여행을 가거나 혼자 산책을 하는 것도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잠깐만 연락이 닿지 않아도 불같이 화를 내는 그를 보면서 나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했다. 당시에 나는 좋아하는 사람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며 친구들과의 만남을 자제했고, 최대한 근무시간에 업무를 마치려고 노력했고, 회식자리에는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직장생활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1년에 한 번 해외여행도 미뤄뒀고, 혼자 영화를 보거나 산책을 하는 시간도 잊고 살았다. ‘신데렐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나는 그에게 맞춰 삶의 패턴을 바꿔 갔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삶의 패턴을 바꿨는데도 다툼은 잦아들지 않았다. K와 나는 사소한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서로에게 끊임없이 생채기를 냈다. 나를 버리고 그를 맞춰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피해의식과 보상심리가 맞물려 점점 더 모난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한 사람의 날카로움은 그대로 상대의 날카로움을 자극했다. 우리는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서로 상처를 내는 연애를 지속했다. 


그리고 그와 헤어졌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는지 깨닫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것만으로 다시 나다워졌다. 


그럼 그와 나는 뭐가 문제였을까. 서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는 둘 다 관계에 서툴었던 거다. 사랑하니까, 사랑받기 위해서 스스로를 감추고 상대를 맞추는 데 급급했다. 나라는 사람을 상대에게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고, 진짜 자신을 감추고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자연스러웠을 리 없다.  


이제는 우리가 맞지 않는 상대였다고 생각한다. 여러 번 연애를 하면서 나라는 사람에게 참 많은 모습이 있다는 것을 깨닫았다. 당찬 모습도, 애교 넘치는 모습도, 유쾌하게 호기심 넘치는 모습도, 진중하게 관찰하는 모습도, 부르르 화를 내는 모습도 전부 ‘나’라는 사람이다. 내 안에 숨겨진 많은 모습들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것뿐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수많은 모습과 장단점이 상대방에 의해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드러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가장 좋은 점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상대를 만나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함께 있으면 어느새 좋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상대가 분명 있다. 그러니 너무 사랑해도 그 상대가 나의 감정을 자꾸만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면 그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너무 사랑하는 감정이 때로는 긍정이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을 하면 자꾸 ‘그’로 인해 행복한 삶을 꿈꾸게 되는데, 나는 ‘나’로 인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상대가 아무리 소중해도 내가 사랑하는 ‘너’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를 버리면서까지 상대를 맞춰가는 것이 결코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지금 내 주변에는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람들만 존재한다. 


지금 사랑하고 있거나, 앞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 한마디를 건넬 수 있다면..

아주 조심스럽게


그로 행복한 삶이 아니라 너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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