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자리_이별로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10년의 연애를 정리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후회하느냐’라는 것이다. 그때 그 질문에 나는 무엇을 후회해야 했던 걸까. H와의 헤어짐을 후회해야 하는지, 더 빨리 헤어지지 못한 것을 후회해야 하는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당시에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후회했는데 후회하지 않은 척했는지, 진심으로 후회하지 않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뼈저리게 후회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만남에는 이유가 있듯 헤어짐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H와의 깊고 깊은 연애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그의 사소한 거짓말 때문이었지만, 어쩌면 그때 우리의 계절은 이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시생이었던 H와의 연애는 서른을 넘기면서 위태로워졌다. 안정감을 좇았던 나와 여전히 꿈을 향해 달려가길 원하는 H는 삶의 방향성이 달라지고 있었다. 사소한 일상을 공유할 수 없었고, 늘 돈에 쫓기고 시간에 쫓겨야 하는 연애에 두 사람 모두 지쳐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처럼 깊어진 의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릴 수 없어서 지속된 연애였다.
그런 그가 실은 친구들과 새벽까지 흥청망청 보낸 시간이 많았고, 그로 인한 피로감으로 공부하지 못한 날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우리의 계절은 끝이 났다. 믿었던 만큼의 좌절감과 마음 한 구석을 도려내는 것 같은 실망감에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한순간 미래가 송두리째 날아간 것 같은 상실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니 나는 이별을 선택했다.
다시 누군가 그때처럼 ‘후회하느냐’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길고 길었던 연애도, 길 위에 버려진 것 같았던 이별도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절 그때에 H가 있었다는 건 나에게 너무나 큰 축복이고, 그 시절 그때에 내가 이별을 선택했던 것도 축복이라 생각한다.
세상에 쉬운 이별이란 없지만, 견디다 보면 생각하는 날보다 생각하지 않는 날이 많아지고, 그리워하는 날보다 그리워하지 않는 날이 많아진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이별도 언젠가 웃으며 추억할 날이 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결국 시간을 견뎌내면 그 견딤의 끝에 봄이 온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동안 봄의 존재를 잊게 되지만 늘 그렇듯 시간은 흐르고 봄은 온다. 차가운 바람 끝에 스치듯 온기를 느끼는 날이 오고야 만다. 영원히 겨울일 것 같은 마음에도 봄볕이 내려앉는다.
나이가 들면 연애를 할 때도 이별을 할 때도 걱정이 많아진다.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 봐,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앞선다. 나와 나의 친구들도 모두 그런 걱정으로 20대와 30대를 보냈다. 그리고 몇몇 친구는 아직도 그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별을 결정하기 전 나는 헤어짐 이후에 혼자 남겨질 시간이 두려웠다. 혼자된 시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끝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내가 걱정하고 고민해야 했던 것은 당장의 아픔이 아니라 그와 나 사이, 우리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다. 헤어짐의 이유가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인지, 변화할 수 있는 부분인지 고민했어야 한다. 또 서로가 그 문제에 대해 노력할 의지가 있는지도 함께 이야기했어야 한다. 만약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적인 어려움이 더해진다거나 감정의 골이 깊어질 문제라면 힘들더라도 이별을 선택하는 것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내가 H와의 이별을 고민할 때 이혼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연애할 때 나는 전남편의 문제가 뭔 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 다만 결혼이 하고 싶어서 모르는 척했던 거지. 결국은 같은 문제로 이혼을 결심할 때 정말 화가 나더라고. 변하지 않는 그에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이 모든 문제를 알고도 방치한 채 결혼한 나 자신한테 정말 화가 나더라고. 내가 이토록 소중한 내 인생을 스스로 망쳤구나. 내 자신이 용서가 안 되더라.”
연애를 할 때 상대가 너무 좋거나 결혼에 대한 압박을 느끼면 눈 앞에 보이는 문제들을 묻어두게 된다. 이건 남녀 모두 마찬가지다. 이 여자의 문제, 이 남자의 문제를 일단 덮어둔다. 상황이 바뀌면 변화할 것이라고 믿고 섣불리 기대해버린다. 상대방은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았는데 혼자 믿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현실에 직면하면 표면에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결국 우리는 몇 배는 더 아픈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별에 앞서, 한번쯤 이별의 이유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 보길 바란다. 당장 겪어내야 할 이별의 무게가 힘들겠지만, 그 선택이 나를 위한 선택이라면 당연히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이별을 할 때도 ‘상대’가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32살, 오랜 연애를 끝내며 나 또한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 봐 초조했다. 갑자기 30대라는 나이가 무겁게 느껴졌고, 친구들의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조바심을 느꼈다. 그러나 결국 이별이 머문 자리에 사랑이 찾아왔다. 그러니, 지금 이별로 아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기 자신을 무너뜨릴 만큼 너무 오래 아파하지는 말기를. 이별을 통해 조금 더 성장했다고 믿고, 묵묵히 시간을 견뎌내기를.
곧 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