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층 방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음악이 아닌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렸다. 워낙 희미하게 나기도 했지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음악을 끄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보니, 남편이 무릎을 꿇은 채로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도 못 할 만큼 감정에 복받쳐 울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황에 대체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니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조쉬’가 하늘로 떠났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도 그를 부여잡고 같이 울기 시작했다.
조쉬는 남편이 어렸을 때부터 많은 걸 함께한 가장 친한 친구였다. 같은 동네, 같은 학교를 나와 속속들이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결혼 전 남편이 유일하게 내게 소개했던 친구였고, 우리가 이사를 했을 때 가족들을 이끌고 제일 먼저 방문했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쉬 본인이 아니라 그의 아내로부터 받은 연락이었다.
근래 심한 두통에 시달렸던 조쉬는 그게 코로나 후유증이라 생각해 병원 진찰을 미뤄왔다가, 운전이 어려울 정도로 고통이 극심해지고 나서야 대학 병원을 찾았다. 의사들은 진찰 당일 그의 머리에서 뇌종양을 발견했고, 바로 입원을 시켰다. 남편과 내가 그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을 때, 조쉬는 뇌압 때문에 급한 대로 이마 앞부분의 두개골을 절제해 고통을 줄이는 수술을 받은 뒤였다. 다행히 그는 우리를 알아보고 대화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그가 안정되는 대로 어떻게 뇌종양을 제거할지 구체적인 검사와 수술법에 대해 알아본다고 했다. 하지만 면회를 마치고 나오자 조쉬의 아내는 우리 앞에서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 두 자녀가 있는데, 조쉬가 입원 후부터 지금까지 전혀 아내에게 아이들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쉬의 아내는 그가 벌써 뇌종양으로 아이들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너무나 가슴 아파했다.
당연히 심각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발견했으니 방법이 있을 거라며 우리는 최대한 희망회로를 돌리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달리, 암 전문센터에서는 종양 발견이 늦었고, 하필이면 부위가 뇌라 직접적으로 칼을 대는 수술이 어렵다며 화학 요법을 먼저 권했다. 그들은 화학치료라도 받아 보기로 했지만, 사실 내심 알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치료를 시작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조쉬는 본인의 집에서 조용히 잠든 후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남편은 조쉬가 떠났다고 메시지를 받은 그날,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쓰러져 오랫동안 눈물을 토해냈다. 처음 보는 남편의 약한 모습이었다. 이러다 본인도 잘못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조용히 안아주는 일뿐이었다.
조쉬의 장례식 날짜가 정해지고, 우리는 2박 3일 일정으로 남편의 고향으로 갔다. 장례 전날 밤, 식장에서는 가족들과 친지들의 방문을 받았다. 솔직히 식장에 갈 때까지만 해도 조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는데, 관 속에 조용히 누워 있는 그를 보자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지인이라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몸을 직접 볼 일이 없어, 살짝 긴장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꽃들에 둘러 쌓여 조용히 누워 있는 조쉬를 보는 건 생각보다 별다른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해맑게 웃으며 식장을 뛰어다니는 조쉬의 두 아이들을 보는 게 더 이질적이라 눈물이 고였다.
관 옆에는 조쉬의 아버지가 서 계셨다. 그분은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 당장 살아갈 날이 구 만리인 손주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쉬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집을 떠나셨다고 하는데, 아들이 이리 먼저 하늘로 간 걸 아는지 모르는지 결국 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찾은 식장에서 조쉬가 생전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며 추모식을 갖고, 남편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조쉬의 가족 묘지로 그의 관을 옮겼다.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많이 힘들어했다. 평소 조쉬와 자주 문자를 주고받았기에, 한동안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말없이 오랫동안 쳐다보고는 했다. 지금은 그와의 추억을 얘기할 정도로 많이 나아졌지만, 가족 같은 친구를 떠나보낸 그 슬픔은 오래도록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가는 데 순서 없다지만 아직 한창인 나이에 종양으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그를 보자, 전보다 죽음이 가깝게 느껴졌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를 수없이 앓아왔고, 목숨이 위험할 뻔한 사고들도 겪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사람 인생 정말 알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동시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내는 게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님을, 나이를 차곡차곡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바란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 절실히 와닿는다. 아무리 의학과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아직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많다. 나는 그저 나의 몫을 다 하며 오늘 하루를 감사하게 살아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