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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청력을 잃었다

by 라봇

미국에서 살기 시작한 후 2년 만에 한국에 간 때였다. 미국에 있다가 처음 한국에 갔을 때라 약 두 달 정도 머물면서 거의 매일 같이 약속을 잡고 친구들을 만났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녔다. 오래간만에 고국에 왔다는 기쁨과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한국어로 수다를 떠는 게 너무 즐거워 피곤하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그리고 한국에 온 김에 전에 살던 베트남도 그리워져 3박 4일간의 짧은 비행기표도 예약했다. 미국에서 베트남 가는 것보다야 한국에 있을 때 방문하는 게 훨씬 편한 건 당연지사니까.


베트남으로 출국하기 전 날 밤, 가족들과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거실 소파 오른쪽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문득 아빠의 목소리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내 바로 왼쪽에 앉아 있는 아빠가 하는 말이, 저 멀리 거실 끝에서 하는 것처럼 아주 멀게 느껴진 것이다. 귀도 후벼보고 아빠 가까이 귀를 들이밀었지만, 이번에는 멀리서 얘기하는 걸 넘어 아빠 목소리가 웅웅 거리는 소리에 겹쳐 들렸다. 뿐만 아니었다.

특정 온도에 도달하면 ‘삐-‘소리를 내는 주전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왼쪽이 아예 들리지 않았다. 오른쪽 귀로는 들려 현재 주전자가 소리를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살면서 귓병이나 청력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어서, 이 상황이 매우 낯설고 무서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일 아침 병원을 가고 싶었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베트남행 비행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제 와서 비행기 표를 바꾸기도 어렵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후 베트남에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에, 피곤해서 이상 증상이 나왔나 보다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인 채 일정대로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랐다.


알았다면 그 시기를 피해 예약했겠지만, 하필이면 내가 베트남에 갔을 때 큰 태풍이 예고되어 있었다. 그걸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 알았다. 태풍 때문에 예비 발전기가 있는 호텔로 옮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전을 위해 창문이 없는 방으로 체크인을 해줬다. 태풍이 왔을 때야, 보다 안전하겠지만 창문 없는 방에 있으니 마치 방음벽에 둘러싸인 것처럼 고요함과 적막감을 살결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깨달았다. 귀에 이명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학생 때부터 종종 순간적으로 귀가 먹먹해지며 ‘삐’ 소리가 머릿속에 울릴 때가 있었는데, 기다리면 금방 사라지는 증상이었고, 나한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기에 별로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근데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즈음 그런 현상이 평소보다 자주 일어났다는 것이 생각났다. 분명 몇 초 뒤에 사라져야 할 이명이, 사라지지 않았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귓속에서 발전기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눌 때도,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왼쪽 귀로는 잘 들리지 않아 자리를 바꿔야 했다. 왼쪽 귀로는 손가락을 귓바퀴 바로 앞에 대고 비비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무서웠다. 자고 나면 나아질 줄 알았던 증상이 더 심해지고 있어, 병원에 안 가고 베트남에 온 것을 후회됐다. 게다가 하필이면 태풍 시기에 와서 호텔방에만 갇혀 있지 않은가. 비행기표를 빨리 바꿔 돌아가고 싶어도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줄줄이 결항되고 있어서 바꿀 수도 없었다.


귀가 잘못되었다는 두려움이 베트남에 있는 시간을 영겁으로 만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개인 이비인후과부터 규모가 있는 종합병원까지 여러 군데를 돌았다. 의사의 진단명은 돌발성 난청으로 인한 이명이었다. 원인도 모르며 예후도 좋지 않다고 했다. 혹시 뇌에 뭐라도 생긴 건가 싶어 입원해 MRI까지 찍었다.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고막 주사를 여러 번 맞았다. 그래로 해결되지 않아 한의원도 동시에 다니며 경추 교정, 침, TMI치료 등 별거 별거를 다 하며 돈을 쏟아부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지급을 안 하려는 보험사 탓에 저금이 왕창 깨졌지만,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어떻게든 고치고 싶은 간절함에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


난청과 이명을 겪으며 근래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슬프게도 현대 의학으로 쉽게 고치기 어려운 증상이라는 것도 들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미국 병원도 찾아갔지만 여전히 나는 24시간 돌아가는 기계음을 들으며 살고 있다. 처음에는 왼쪽에만 들리던 소리가 오른쪽으로 옮겨갔고, 그래서 오른쪽 귀까지 청력이 좀 떨어지기는 했지만, 처음에 최악이었던 왼쪽 청력은 어느 정도 올라가 일상생활은 할 수 있는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어느 방향에서 들리는 건지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면 더 나빠지는 것 밖에 없기에 귀 영양제, 귀 마사지 등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무언가를 해보고 있기는 하다. 귀가 안 들린다는 건 자동차 클락션 같은 경고음을 못 들어 위험에 처하기 쉽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어려워 고립되기도 쉽다는 걸 의미하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내 또래 주변인 중에 난청이 생긴 사람은 나 밖에 없어서,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지만 결국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일이 벌어진 후에 대응이다. 지금은 불안감과 좌절감에 뒤덮여 있기보다 요즘 보청기도 작고 귀엽게 잘 나온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계속 일상을 살아가려 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 소리는 잘 들리고, 이명소리 안 들리는 세상이 그립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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