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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의 저장 강박증

by 라봇

대부분의 미국 주택들은 차고나 창고가 넉넉히 있는 편이다. 우리 집은 큰 평수의 집이 아닌데도, 집과 지붕이 연결된 창고 하나와 뒤뜰에 나무로 만든 창고, 이렇게 두 개가 있다. 크지 않은 창고들이지만 한 번도 이 창고들이 우리에게 부족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다른 집들을 보면 우리보다 훨씬 크고 많은 창고가 있는데도, 그곳을 꽉꽉 채우지 못해 별도로 돈을 내고 다른 창고를 빌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웃집 할머니는 우리 집의 세 배가 넘는 크기에 살면서도, 외부에 큰 창고를 빌려 물건들을 저장하고 있는데, 잘은 몰라도 그 창고 대여비로 적어도 달에 10만 원 이상은 내고 있다. 무려 14년 동안이나! 14년간 물건들을 보관해 두고 한 번도 찾아가지 않고 보관료만 낸다. 14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는 물건들이라면 분명 중요하지도 쓸모 있지도 않은 물건일 가능성이 큰데, 그것들을 버리지 않기 위해 14년간 매달 10만 원씩 내고 있다니, 나라면 차라리 물건을 정리하고 그 돈으로 다른 걸 해도 몇 번은 넘게 했을 돈이다. 큰 3층 집에 살면서도 물건이 넘쳐 창고를 대여한다는 건, 집 안은 어느 정도인지 말 안 해도 가늠이 될 것이다. 할머니의 젊었을 적 물건은 물론이고, 물려받은 할머니의 할머니 물건까지, 집 안에 TV쇼 진품명품을 차려도 될 만큼 케케묵은 물건들이 가득이다. 물론 추억이 가득한 물건이거나 집 안의 중요한 물건도 있겠지만, 가서 살펴보면 사실 그렇지 않은 물건들이 더 많다. 할머니가 정리하기 귀찮고 힘들어서 그냥 둔 것도 있지만, 일단 할머니가 물건들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버리면 큰 일 나는 줄 안다.


처음에는 강박장애 같은 건가 싶었는데, 미국에 있다 보니 이웃집 할머니 한 분만 그러는 게 아니라 나이 상관없이 차고에 물건을 가득 채워두고 창고를 빌리는 사람을 정말 많이 본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시부모님 댁에만 가도 큼직한 창고가 세 개나 있는데 세 곳이 고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바퀴가 빠지거나 엔진이 완전히 망가져 움직일 수 없는 차들, 더 이상 쓰지 않는 냉장고와 세탁기, 무엇에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잡다한 것들이다. 물어보면 딱히 추억이 있는 물건들도 아니고, 다시 쓸 일은 두 번 다시없는 물건들인데, 그것들을 팔 생각도, 버릴 생각도 안 하신다. 왜 계속 창고에 보관하시냐고 물어보면, 딱히 명확한 대답을 해주시는 것도 아니고, 남편 또한 모르겠다고 한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러하다고 생각할 만한 통계 수치도 있다. 미국 내에 5만 개 이상의 셀프 스토리지 시설이 있는데, 이는 전 세계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고 한다. 넷플릭스나 소셜미디어에서 불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하는 프로그램도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실제로 정리보다는 보관을 더 선호하는 미국인들이 많다. 게다가 이들의 소비 중심 문화도 한몫한다. 블랙프라이데이, 사이버 먼데이 같은 대형 할인 이벤트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지금 필요가 없더라도 일단 할인할 때 사두는 경향이 있다. 현금 선물도 인기가 있는 한국과 달리, 여기서는 현금 선물이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아서 꼭 물건으로 무언가를 사서 선물한다. 기부, 중고 판매 시스템도 잘 되어 있는 나라지만, 여전히 물건을 정리하고 처리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아직 쓸 수 있는 걸 버리는 건 낭비라는 생각도 강하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결국 나중에 삶을 마감하게 되면, 그제야 남은 가족들이 그 많은 물건들을 estate sale이라는 이름으로 처분한다.

평균적인 주거 공간이 넓으니 물건들도 자연스럽게 많아지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추가로 외부 창고까지 돈을 내면서 보관할 정도로 모든 걸 끌어안고 있어야 되나 싶다. 이런 성향 때문에 미국 내에는 이미 셀프 스토리지 시설이 많은데도 계속 생기고 있고, 아직도 꽤 괜찮은 사업 모델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저것 물건들을 사 모으고 돈까지 내면서 보관하는 걸 보면 역시 미국은 부자 국가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아무리 부자라도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처럼 어차피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을 텐데, 나는 이 나라에 있어도 물건에 짓눌려 있기보다 좀 더 가벼운 삶을 선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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