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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은 아닌 번역

by 라봇

며칠 전, 외국 원서를 읽고 감상문을 블로그에 남기며 언급하고 싶은 문장들을 따로 번역해 올린 적이 있다. 나는 내 블로그에 달린 댓글은 꼼꼼하게 읽어보는 편인데, 그중 짧은 댓글 하나가 신경 쓰였다.

“이거 원문에서 번역하신 거죠? 잘 옮기셨네요. 저도 이거 그냥 가져가 써야겠어요.”


내 번역문을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 주는 건 좋았지만, 그걸 ‘그냥 가져가 쓴다’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냥’이라는 단어 앞에서, 내가 번역문을 올리기 전 붙잡고 씨름했던 문장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sigh’는 한숨인가, 탄식인가, 아니면 체념인가. ‘take a step back’은 실제로 물러서는 동작인가, 감정적인 거리 두기인가. 어느 단어 하나 가볍게 선택한 것은 없었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넘어 그 안에 흐르는 감정의 선을 지키고자, 나는 여러 번 문장을 지웠다 썼다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그냥’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종종 번역을 ‘그냥 옮기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치 번역은 창작의 반대말인 것처럼. 하지만 번역은 단순한 옮김이 아니다. 번역은 분명히 또 다른 창작이다. 비유하자면, 원문은 새벽과 같고 번역은 아침 햇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빛은 같지만, 온도와 결이 다르다는 뜻이다. 낯선 단어를 그 흐름을 유지하며 내 말로 옮겨야 하는 고요한 작업의 순간에서, 번역자는 분명히 창작자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번역가는 종종 이 창작의 서사에서 제외된다. 콘텐츠의 소개글에도, 독자의 기억에도. 가끔은 ‘이 책 너무 좋았어’라는 감탄 속에서도, 그 책이 다른 언어로 태어나기 위해 누군가 고심했던 시간은 잊힌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이 글이 번역이 아니라, 내가 처음부터 쓴 글이었다면 그 댓글은 같은 톤으로 달렸을까? ‘그냥 가져가 써야겠어요’라는 말을 들었을까?


오랫동안 번역에 관심을 갖고 해오다 보면, 문장을 쓰는 손이 아닌 읽는 눈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난다. 책을 읽을 때, 자막을 볼 때, 뉴스 기사를 접할 때 나는 무의식 중에 번역의 흔적을 찾게 된다. 문장의 결이 어딘가 낯설면 ‘직역’인지 ‘의역’인지 가늠하고, 자연스러운 문장은 반사적으로 “이거 누가 옮겼을까?” 하고 궁금해진다. 그렇게 ‘번역’이라는 이름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름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품고도 말없이 지워지는지를 새삼 자주 마주한다.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는 번역가의 존재에 대해 모순된 태도를 취한다. 외국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이렇게 아름답게 쓴 문장 처음 봤다’고 감탄하지만, 그 문장을 옮긴 사람의 이름은 모른다. 가끔은 “번역이 깔끔하네요”라는 말로 최대한의 찬사를 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창작의 결과물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드물다. 그저 “잘 옮겼네요”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수고가 함축된다. 고심 끝에 빚어낸 문장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그 감탄은 늘 원작자의 몫이다. 나는 이런 현실이 단지 ‘관심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창작과 번역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이해해 온 오랜 문화적 관성이 문제다. 창작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일’로, 번역은 ‘있는 것을 옮기는 일’로 규정되어 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번역가는 ‘없는 언어’를 새로 발굴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원작의 감정과 분위기, 뉘앙스를 통째로 새 언어의 틀 속에 옮기면서, 원문에 없던 문장을 ‘짓는’ 사람이다. 감정의 실루엣을 언어로 복원하는 과정, 그건 분명 창작이자 해석의 작업이다.


법적으로도 물론 원작자의 저작권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번역된 작품도 또 다른 의미의 '창작물'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낮다. 저작권법 제5조는 ‘번역물’을 2차적 저작물로 분명히 정의하고 있다. 이는 곧 번역도 원작을 바탕으로 한 창작 행위라는 뜻이다. 원작자의 창조를 존중하면서도, 번역자는 자신만의 언어 감각과 해석으로 또 다른 창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번역가는 자신을 감추는 훈련을 받는다. 작가보다 튀지 않게, 문장보다 먼저 드러나지 않게.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는 유리 같다. 투명해야 하고, 존재해서는 안 되는 듯이 존재해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번역은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적절한 색감을 띤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의 빛을 그대로 반사하되, 그것이 한국어라는 세계 안에서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일. 독자가 ‘이 문장 좋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이 번역가에게 닿는 일은 드물지만, 그 말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바로 번역가다.


AI 시대인 지금, 요즘은 인공지능이 번역을 한다. 버튼 하나면 문장이 나오고, 문서 전체가 순식간에 한국어로 바뀐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번역가는 필요 없지 않냐고.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번역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AI는 원문을 분석하고, 대체 가능한 단어를 고른다. 패턴과 문법에 맞춰 매끄럽게 문장을 배열한다. 하지만 AI는 ‘감정’을 해석하지 못한다. 문장의 숨결을 읽고, 독자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언어를 직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진짜 번역’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번역은 문장이라는 수학이 아닌, 감정이라는 시를 다루는 일임에 분명하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번역은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말의 결을 존중하며, 다른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고, 그 선택은 각자의 언어 감각과 문장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번역은 절대 ‘그냥’ 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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