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0대에 보청기를 꼈다

by 라봇

나는 몇 년 전부터 돌발성 난청과 이명으로 고생 중이다. 스테로이드 약, 고막 주사, TMS, 한약 등 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해봤지만 아직도 원인과 치료법을 못 찾고 있다. 특정 데시벨 구간이 안 들리고 늘 이명과 함께 하는 삶은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리를 아예 못 듣는 건 아니고, 이명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것도 아니라 그냥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비행기를 세 번이나 타고 이사를 하느라 몸이 힘들었던 건지, 아니면 말레이시아 비자국과 말도 안 되는 핑퐁 게임을 하느라 스트레스가 심했던 건지, 이곳에 도착하고 일주일도 안 돼 급격히 귀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본래 돌발성 난청이 처음 시작됐던 왼쪽 귀의 청력이 급격히 떨어졌는데, 귀 바로 옆에 대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까지 안 들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큰 소리가 나면 귀가 미친 듯이 반응해 고주파를 울려대는 바람에 일상생활에 엄청난 지장이 갔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비닐봉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 설거지 소리 하나하나에 찢어질 듯 반응하는 이명소리가 머리를 울려 미칠 것 같았다. 서둘러 쿠알라룸푸르 내에 있는 대형 병원 이비인후과를 찾았지만, 당연히 한국, 미국에서도 찾지 못했던 이 증상의 원인이 하루아침에 발견될 리 없었다. 의사는 원인을 몰라 도리가 없다며 나에게 보청기 작용을 권했다.


60대인 우리 부모님도 아직 보청기는 끼지 않으시는데, 마흔도 안 된 내가 보청기라니.. 보청기를 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앞으로 내 청력과 이명은 나아질 희망 따위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다른 병원을 찾아도 되지만, 이미 몇 년 전 처음 돌발성 난청이 발생했을 때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기에 말레이시아 내에서 다른 병원을 더 돈다고 갑자기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의사의 말을 따라 청력테스트를 다시 하고 테스트 용 보청기를 받았다.


다행이었던 건, 요즘 보청기는 내가 알던 보청기와 완전 다르다는 것이었다. 내 기억 속 보청기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쓰던 것이었는데, 두툼한 옥색의 그것은, 착용하면 귓구멍을 다 막을 만한 사이즈였다. 게다가 때로는 필요 없는 소리까지 너무 크게 들려 불편하다며, 할아버지는 보청기가 있는데도 대부분 빼놓고 안 들리는 상태로 생활하실 때가 많았다. 내 기억 속에 보청기는 그것이었기에, 보청기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절망감과 불안감이 먼저였다.


그런데 간호사가 내민 보청기는 에어팟보다도 훨씬 작은 크기여서 착용하면 오히려 귓바퀴에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긴 머리가 아니라 묶은 머리였는데도 나를 정면으로 보고 얘기하던 남편조차 내가 보청기를 착용했단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어느 정도 알아서 시끄러운 소음은 걸려주기 때문에 보청기를 착용했다고 세상 온갖 소리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명에는 도움이 안 됐지만, 그래도 보청기 자체는 굉장히 작고 기능 좋게 발전했기에, 바닥을 쳤던 기분이 조금은 올라왔다. 그렇게 보청기 착용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일주일 동안 테스트 기간을 거쳤다. 속상해할 가족들을 생각해 남편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테스트 기간 동안 놀라운 일이 생겼다.


중국계가 많은 말레이시아에는 TCM이라고 해서 Traditional Chinese Medicine이라는 종류의 중의학 병원이 상당히 많이 있다. 한국의 한방 병원 같은 곳인데, 집 구할 동네를 돌다가 이 병원들을 발견한 남편이, 어차피 보청기도 착용하기로 했는데 잃을 게 뭐냐며 저기도 가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다행히 당일 예약이 가능해서 바로 의사를 만날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한방 병원을 안 다녀본 게 아니기에 별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침을 맞고 처방받은 한약을 복용한 지 이틀 만에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침 맞은 직후에는 귀가 좀 편안해진 것 같더니, 어느 순간 이명이 줄어들고 다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난청과 이명이 나은 것은 아니고 악화되기 전 상태로 돌아간 것뿐이었지만, 그것 만으로도 보청기가 필요 없을 정도는 회복이 되었다. 그래서 일주일 뒤 보청기를 반납하고 지금은 TCM에서 종종 약만 처방받아먹고 있다. 아쉽게도 그 이상의 회복은 보이지 않지만, 악화되었던 상태가 최악이었기에 지금의 상태만이라도 감사할 뿐이다.


어렸을 때 몸이 약해 병원을 전전하며 건강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청력을 잃은 경험을 해보니 건강이란 게 갑자기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생생하게 느낀다. 그리고 아무리 관리해도 노화에 따라 조금씩 무뎌지는 기능들도 앞으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속상하겠지만 이미 보청기를 한 번 껴 본 적이 있으니 나중에는 조금 더 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체력 소모를 많이 요하는 국가 간의 이사를 몇 번 하며 몸이 안 좋아지는 경험을 하니, 여러 나라에서 살고 싶다던 마음이 옅어지고 정착에 대한 생각이 짙어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