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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길거리에서 돈을 뜯겼다

by 라봇

장거리 이사로 인한 무리 해서인지 심해진 이명과 난청으로 나는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큰 병원의 이비인후과를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결국 그 병원이 도움이 된 건 아니었지만, 정밀 청력 검사를 비롯해 보청기도 병원을 통해서 받았기 때문에 이사하고 초반 한 달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갔었다. 처음에는 내가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영어 발음을 잘 못 알아들어, 그게 걱정된 남편이 같이 동행했었다. 그런데 남편으로 인해 병원 앞에서 돈을 뜯기면서 나중에는 혼자 다니게 되었다. 대형 병원이라 병원비가 좀 비싸기는 했어도, '돈을 뜯겼다'라고 표현할 정도의 병원비는 아니었다. 실제로 돈을 뜯긴 것은 병원 바로 앞에 도사리고 있는 이들 때문이었다.


주로 혼자 행동하는 이 사람들은 병원 근처에 있지만 병원 바로 앞에 있지는 않다. 병원 부지에서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거리를 어슬렁 거리다가, 병원에서 나오는 '외국인'을 보면 다가온다. 나는 누가 봐도 중국계 말레이시아 사람처럼 생겼기 때문에 나 때문에 다가온 것은 아닐 것이다. 흰 피부에 파란 눈, 누가 봐도 어리바리하게 보이는 남편이 그들의 타깃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어 주었다.

우리에게 느릿느릿 다가온 그는 방글라데시아. 스리랑카. 네팔. 인도 쪽 계통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우리가 아직 말레이시아 모바일 지갑도 없이 현금만 갖고 다니는 외국인이라는 걸 알았는지 다가오자마자 현금을 요구했다. 그가 처음에 이용한 것은 바로 동정심 자극이었다.


본인은 여행자인데, 말레이시아에 와서 강도를 당해 핸드폰이건 지갑이건 다 뺏긴 상태에서 사고를 당해 지금 당장 병원에 가서 항생제를 맞아야 한다는 게 그가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는 이유였다. 당연히 믿기 힘든 이유라 내가 멀뚱멀뚱 서 있으니, 그는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남편 앞에서 입고 있던 셔츠를 위로 들어 올려 배를 내보였다. 그의 배꼽 옆에는 누런 진물이 흘러내리다 못해 굳어져버린 징그럽고도 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상처가 썩고 있는 듯한, 지금 당장 응급실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할 듯한 상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히 그 상처가 진짜라고 믿기 어려웠다. 요즘에는 누구나 분장. 메이크업 도구를 쉽게 살 수 있는 데다, 나 역시 미국에서 핼러윈 시즌에 좀비 분장을 위해 스티커식 상처 분장 도구를 구매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게 진짜인지 아닌 지 구별하기 어려워 망설이고 있었는데,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는 남편은 그가 상처를 들추자마자 바로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며 바로 지갑을 꺼냈다. 그러고는 당장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으라며 지폐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하지만 그다음이 더 문제였다.


상대가 좋은 사람인 지 알고 싶다면 일부러 잘해주라는 말이 있다, 내가 잘해줬을 때 나의 호의를 매우 고마워하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고, 나를 호구로 보면 피해야 할 사람인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바로 돈을 꺼내자 그의 태도는 호의에 고마워하기보다는 이 정도는 부족하다는 게 바로 첫 반응이었다. 이 금액으로는 보험도 없는 내가 대형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우리한테 병원비라도 맡겨둔 것처럼 구는 게 어이없었지만, 남편은 그의 말을 듣고 지갑에 있는 모든 지폐를 다 털어주었다. 그런데도 끝나지 않았다.


지갑을 탈탈 털어 준 것을 보여줬는데도 그는 여전히 우리를 떠나지 않고 돈이 부족하다는 말만 했다. 이제는 남편마저 나에게 얼마 있냐고 물어봤다. 그 남자는 본인이 원하는 금액을 받아낼 때까지 우리 옆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물론 그의 상처를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가짜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도 없거니와 같이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자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기에는 이미 귓병으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결국 나 또한 지갑을 꺼내 안에 있던 가장 큰 단위의 지폐를 쥐어주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를 보고, 그제야 남편도 무례함을 느꼈는지 더 이상 우리가 도와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갑자기 단호해진 남편의 태도와 함께, 길 건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한 커플을 보고 그는 드디어 길을 내줬다.


우리에게 다가온 커플은 말레이시아 현지 사람들이었는데, 건너편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너무 걱정돼서 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외국인 남자가 그에게 돈을 건네더니, 이번에는 여자까지 돈을 주는 걸 보고 분명 무엇이 잘 못 되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남편은 그들에게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하며, 그의 짓무른 상처를 확인했기 때문에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말레이시아 거주 외국인 커뮤니티에 병원 앞에서 삥 뜯는 남자를 조심하라는 글이 올라왔다. 당연히 상처는 분장으로 만든 가짜이며, 병원 앞에서 그 가짜 상처를 들추며 돈을 뜯은 상대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그 남자임이 분명했다.


우리가 그에게 준 돈이 아주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상처를 보고 눈 돌아가서 바로 간도 쓸개도 빼줄 것처럼 현금을 꺼낸 남편이 어이없기도 하고 걱정도 됐다. 이기적인 사람보다는 낫지만 안타까워 보이면 사실 확인도 없이 그저 바로 돈을 꺼내주는 게 나중에 사기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어린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일로 오히려 말레이시아 현지인들에 대한 신뢰는 높아졌다. 바보처럼 돈을 뜯기고 있는 외국인들이 걱정돼 무시하지 않고 다가와준 그들의 행동이 이 나라 사람들의 도덕 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아직까지 병원 앞에서 돈을 뜯긴 것 외에는 현지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강도를 당한 일은 없다. 앞으로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남을 도와줄 거면 그렇게 바보처럼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상대에게 내 의지로 도움을 배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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