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집 돈까스를 먹은 날
저는 먹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위장은 작디작은, 재능이 열정을 못 따라가는 사람이죠. 그래서 한 끼 식사를 할 때마다 정성스럽게 메뉴와 식당 선정에 열정을 쏟습니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는 것‘을 싫어하는 거죠.
오늘은 평소에 올 일이 없는 지역에서 점심을 먹지 못한 채 시간이 붕 떠버렸습니다. 지하철 앱을 켜고 근처에 자주 가는 단골 맛집이 있나 찾아봐도 이 날씨에 육수를 줄줄 흘리지 않고 당도할 수 있는 곳은 전무했습니다. 낭패다 싶어 궁여지책으로 구글에 지역명과 맛집을 검색합니다. 광고 전공의 짬밥으로 블로그 광고들들 필터링하며 정처 없이 걷던 중 시야에 뭔가가 들어옵니다. ’김밥천국‘. 간판에는 적어도 십 년 이상의 세월이 묻어있고 김밥 가격에는 0을 5로 고친 흔적, 천 원 단위에 종이를 붙여 1에서 2로 바꾼 흔적이 그득합니다. 명치쯤에 느낌이 빡 왔습니다. 오늘의 식당이 정해졌습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정말 최소한의 성의만이 들어간 ‘어서 오세요’가 데크레센도로 날아옵니다. 아무 데나 앉아 털털거리는 선풍기로 체온을 낮추며 역시나 고친 흔적이 가득한 메뉴판을 살펴봅니다. 김밥류… 라면류… 분식류…. 나열된 순서대로 메뉴를 훑다가 ‘돈가스류’에 시선이 꽂힙니다. 허기의 클리셰처럼 침이 고이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배가 더 고파집니다. 저의 생존본능이 ‘돈까스’를 원하고 있는 것이죠. 돈카츠도, 포크 커틀렛도 아닌 ‘돈까스’ 말입니다. 아쉽게도 쫄면과 김밥이 함께 제공되는(생각해보면 정말 파괴적인 조합입니다) 김밥천국 정식이 없으니 등심돈까스로 메뉴를 결정하고 이모에게 주문을 했습니다.
앞서 정성스럽게 메뉴와 식당을 고른다는 사람이 먹는다는 게 김밥헤븐 돈까스라니. ‘도라이인가?’ 싶어 뒤로 가기를 누르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사실 이런 분식집 돈까스는 맛이 없죠. 공장제 돈까스를 이미 꽤나 많은 음식들을 조리해낸 식용유에 튀겨 시판 소스를 끼얹고 양배추와 통조림 옥수수에 주는 게 다니까요. 얼핏 생각해도 선별된 냉장육을 탕탕 펴고, 밑간과 숙성을 거친 후 여러 겹으로 튀겨내어 육즙이 슥 배어 나오는, 데미그라스 등의 소스보다 그 식당이 제공하는 소금과 와사비가 어울리는 ‘돈카츠’가 몇 단계는 뛰어납니다.
하지만 이런 어설픈 조리 방식을 거친, 어설픈 맛을 지닌, 어설픈 음식을 가끔 미치도록 먹고 싶어 질 때가 있습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죠. 우선 제게 ‘돈카츠’의 역사는 10년이 채 안되었는데 돈까스는 2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가격도 참 살갑구요. 식사를 할 때의 에너지 소모도 적습니다. 사방이 시끌벅적하고 먹는 방법도 복잡한 ‘다이닝’과는 달리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씹고 맛을 즐기는 데에만 집중하면 되니까요. 뇌를 잠시 끈 채 오로지 공산품이 주는 말초적인 자극에만 집중하다 보면 절간에서 풍경을 듣는 것만큼의 평화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여러 측면들 외에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지만 얼핏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생각의 정체를 해소하기 위해 돈까스 외에 제가 좋아하는 어설픈 친구들을 나열해봅니다. 급식에서 나오는 카레, 가끔 뭉쳐서 세 가닥 이상이 붙어있는 짜장면의 면발, 두 번 이상 후추를 뿌려먹는 오뚜기 크림스프, 오래된 식당에서 지나칠 수 없는 무료 프림커피 따위의 것들. 결국에는 희소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예비군 말고는 먹을 수 없는 급식 카레, 균일한 면발들 사이에 혼자 뭉쳐져 있는 밀가루 덩어리, 경양식과 함께 사라져 버린 크림 스프. 이제는 사라져 향수를 자극하는 것들이자 입안에 넣으면 맛보다는 반가움이 먼저 찾아오는 음식들. 맛보다는 추억에 방점을 둔 오래된 것들. 부쩍 10대와 20대 초반이 자주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요즘엔 더욱이 아련한 것들입니다. 어쩌면 분식집으로 발걸음을 이끈 것은 허기가 아니라 그리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없이 궁상을 떠는 도중 음식이 나왔습니다. 김이 풀풀 나는, 소스를 듬뿍 끼얹은 우리네 돈까스. 양배추 위에 성의 없이 뿌려진 케첩과 마요네즈까지 한 치 예상에 어긋나지 않는 구성입니다. 샐러드라고 하기 민망한, ‘사라다’에 가까운 양배추 더미를 슥슥 비빈 뒤 얇디얇은 돈까스를 슥슥 썹니다. 우선 테두리 쪽을 세로로 썰어서 한 입. 다음으로 가장 재료가 풍부하게 들어있는 중간 쪽을 썰어 한 입 집어넣습니다. 들쩍지근한 입 안을 삼삼한 옥수수로 정리한 후 새큼한 사라다. 야채의 맛이 아직 남아있을 때 다시 돈까스를 한 입. 정말 별 것 아닌 멤버들이지만 그 시너지는 마치 잘 짜인 무술 시범처럼 매섭고 강렬합니다. 그렇게 한입 한입 루틴을 반복하다 보면 접시는 깨끗하게 빕니다. 먹고 나니 이 정도면 군대에서 먹던 짬보다 빨리 먹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뎅 물컵에 물을 따라 입을 헹구며 구석에 있는 TV를 봅니다. 비주얼로 봐서는 ‘MC 대격돌’이 나와야 할 것 같은 초소형 TV에서 ‘아이돌룸’이 나오고 있는 장면은 뭔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멍하니 화면에 시선을 두다 문득 생각합니다. ‘아... 맛없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다음부터는 안 먹어야지.’ 제가 한 표현이지만 어설픈 맛이라는 단어가 참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두어 달 지난 후 어느 날 홀리듯이 분식집으로 빨려 들어가리란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다음엔 지겹디 지겨운 불알 친구 놈들과 함께 방문해도 썩 즐거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전히 성의 없는 ‘안녕히 가세요’를 들으며 다시 동네 헬스장의 습식 사우나 같은 서울의 바깥공기로 돌아갑니다. 음식은 맛이 없었지만, 식사는 참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여러분들이 끼니를 때우지 않기를 바라며 줄이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식사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