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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gjoon Aug 07. 2019

‘자비 없는 맛’, 텍사스 바비큐



 유독 음식에 엄격했던 아버지는 고기를 구워 먹다 조금이라도 타면 가위로 도려내고 드시곤 했습니다. ‘이런 거 함부로 먹다가 암 걸리는 거야~’. 죄송합니다 아버지. 불효자는 지금 새까만 양지머리를 와구와구 먹고 있습니다. 오늘의 메뉴는 이름부터 설레는 아메리칸 바비큐입니다.


시꺼먼 고깃덩어리처럼 보이지만 바비큐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로운 비주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표면이 시꺼멓게 탄 것처럼 보이는 바비큐지만 사실 태운 것은 아닙니다. 텍사스식 바비큐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요리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브리스킷(양지머리)과 다음으로 애정하는 풀드 포크(돼지 어깨살) 모두 직화가 아닌 연기로 열 시간 이상 훈연함으로써 완성됩니다. 그 과정에서 표면의 시즈닝이 연기와 반응하여 먹음직스럽기 그지없는 새까만 비주얼이 완성되는 것이죠.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후반부에 샌드위치 재료로 쓰기 위해 브리스킷을 네 덩이 통째로 구매하고 썰어서 맛보는 장면은 제가 뽑는 최고의 위꼴 장면에 당당히 등재되어 있습니다.


 허기를 달래려 애꿎은 라거를 홀짝대는 동안 음식이 나왔습니다. 전형적인 바비큐 2인 플래터. 구성은 브리스킷, 풀드 포크, 버터를 듬뿍 발라 구운 버거 번, 그레이비를 곁들인 매쉬드 포테이토, 감자튀김, 마지막으로 코올슬로입니다. 사실 저는 베이크드 빈즈를 바닥에 깔고 풀드 포크를 듬뿍 넣어 버거를 만들어 먹고 싶었지만 오늘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니 과감히 양보했습니다.


어후...


 먼저 브리스킷을 썰어서 한 입 소스 없이 먹습니다. 바비큐는 곧 글로 소개해드릴 예정인 ‘소롱포’만큼이나 시간이 지나면 맛이 드라마틱하게 떨어집니다. 뜨끈할 때 살코기와 지방 부분이 반씩 섞인 브리스킷을 입에 넣어봅니다. 아직 열이 남아있어 부드럽게 부서지는 살코기 위에서 지방질이 몇 배는 더 부드럽게 녹아내립니다. 감히 수비드로 익힌 닭고기에 비견할 만큼의 부드러움입니다. 강렬한 껍질의 훈연 함에 대비되는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에서 어우러집니다. 정말, 정말로 자비 없는 맛입니다. 일식이나 한식이 ‘육수의 감칠맛... 채소의 아삭함... 고명과 면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식감...’이라고 속삭이는 느낌이라면 이건 ‘고기!!! 훈제향!!!! 맛있다!!!!!!!’’라고 민소매 라이더 재킷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형님이 귓가에 소리치는 듯한 맛입니다. 입 안의 훈연함과 기름기가 채 가시지 않았을 때 라거를 한 입. 후끈하게 더운 날 냉방 빵빵한 실내에서 바비큐를 먹으며 차가운 맥주 한 입. 행복을 꽉꽉 눌러 압축한 맛입니다.


 다음으로는 버거를 만들기 위해 번을 집어 듭니다. 잡은 손가락이 번들번들해질 정도로 버터를 아낌없이 발라 구워낸 번. 제가 미국 음식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름이나 버터 등 한국에서는 건강을 생각해 조금씩 넣는 재료를 무자비하게 때려 넣습니다. 아직도 제이미 올리버의 유투브에서 그가 태연하게 소스를 만드는 데 버터 한 덩이를 무심히 투여하는 장면은 아직도 제게 충격으로 남아있습니다. 건강 따위야 내 알바 아니라는 듯한 이런 무자비한 조리법을 저는 감히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버거에 들쩍지근한 소스를 듬뿍 뿌리고 풀드 포크를 듬뿍 얹습니다. 위쪽에는 양심의 가책을 콩알만큼이나 덜어주는 코올슬로를 아아주 얇게 펴 발라줍니다. 마지막으로 소스를 위에 덧 뿌리면 탄단지(탄수화물, 단백질, 지방)가 조화롭게 꽉꽉 들어찬 버거가 완성됩니다. 야무지게 한 입 베어 뭅니다. 탄수화물 사이에 고기를 끼워서 먹었는데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샌드위치의 아버지인 존 몬태규 백작님이 하늘에서 온화하게 미소 짓는 맛입니다. 남은 버거를 개인접시에 부어놓은 소스에 찍어 털어 넣습니다. 역시 마무리로 라거를 들이켭니다. 페일 에일도, IPA도 좋지만 역시 미국 음식에는 라거라는 게 제 지론입니다.


 사이드로 나온 매쉬드 포테이토 역시 제가 애정하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 음식이야말로 맥 앤 치즈와 함께 미국의 ‘자비 없는 맛’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주자가 아닐까요. 감자를 삶아 버터를 왕창 넣고 으깬 뒤 고기 즙을 끼얹는 요리, 그리고 마카로니를 역시 버터와 온갖 치즈를 넣고 버무려낸 음식이라니. 파워풀하고, 무식하면서, 혈관 좁아지는 맛입니다. 이런 음식들을 포크로 퍼먹고 있자면 오히려 정상체중이 희귀할 정도인 미국의 비만율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제가 미국에 살았으면 지금보다 40kg는 더 나가지 않았을까요.


 널찍하던 철제 서버가 텅텅 비었습니다. 뒤늦은 죄책감이 몰려오기 전에 남은 맥주를 원샷하며 사고 회로를 마비시킵니다. 정말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배가 가득 찬 것 같습니다. 지금 기분이라면 돌멩이를 배고도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나른함입니다. 허나 저도, 친구도 의무와 책임을 어깨에 둘러멘 일반인들이기에 느릿하게 식당을 나섰습니다. '점심에 기름진 거 먹었으니까 저녁은 평냉 먹을까...'따위의, 만복 상태에서도 다음 식사를 고민하는 돼지 같은 생각을 하며 마무리한 점심 식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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