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30.
으이구 이놈의 행동파!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손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집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블로그와 인스타, 포털사이트까지 쭉 훑던 중, 갑자기 든 생각 '이게 뭐하고 있는거지'. 지겹고 갑갑했다. 폰을 내려두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뭔가 달랐으면 좋겠는데…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끝내 발칙하고 소심한 결심을 했다.
'오늘, 핸드폰을 두고 나가보자'
마음을 먹자마자 서랍을 뒤적거려 MP3(아이팟클래식160GB)와 디지털카메라를 꺼냈다. 각각의 충전기들도 뒤적거려 찾아낸 뒤 충전을 시켜놓고서는 샤워를 했다. 물을 끼얹는 중에 유혹이 스며들었다.
'그냥 유심칩 정도만 빼놓고 나가볼까?'
허튼소리. 그랬다가는 분명 와이파이가 되는 곳만 찾아 유목민처럼 옮겨다닐거면서.
이왕 저지르는거 아예 <<백 투 더 아날로그>>로 가보자는 생각에 폴라로이드(후지인스탁스 미니7)와 기기에 들어갈 여섯개의 건전지도 챙겼다. 외출준비를 마치고 미련섞인 눈으로 핸드폰을 올려둔 자리를 다시 한 번 쳐다본 뒤 걸음을 뗐다.
집에서 나와 예전에 쓰던 MP3를 켜서 노래를 틀고 랜덤재생을 시켜보았다. 플레이리스트는 10년전 그대로. 당시 자주 듣던 Fantastic Plastic Machine의 노래가 나왔다. 반가움을 느낀 것도 잠시 노래를 들은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전원이 나가버렸다. 풀충전을 해두고 나온 것인데도 녀석 입장에서는 십년만에 끼니를 챙겨먹은 것이니, 게걸스럽게 해치워버린 것을 탓하기도 뭐하다. 선견지명으로 챙겨온 보조배터리를 꺼내 선을 연결하니 다시 사과모양 아이콘이 떠올랐다. 스마트폰 하나를 챙겨오지 않으니 짐이 서너배 가까이 늘어버렸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서너배 혹은 그 이상의 기능을 스마트폰 하나가 해내고 있는거겠지. 역시 현대문물의 발전은 위대해.
다시 노래를 이어들었다. FPM의 Days and Days. 하옹언니가 무척 좋아하는 노래인데. 평소라면 바로 언니에게 사진을 찍어 카카오톡으로 보내곤 "랜덤으로 돌렸는데 나왔어!"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잠시 그 행동을 열 시간쯤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핸드폰 없이 산다는 건 이런거구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까지 일정한 시간의 틈이 생겨나고 그 시차를 조금의 조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핸드폰과의 분리불안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지하철에 탑승을 했다. 노래도 '정상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으니 가만히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젊은 사람들은 콩나물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선이 달린 이어폰을 귀에 꽂아두고 예상대로 대부분 핸드폰을 보고있었다. 누군가는 인스타그램으로 친구들의 근황을 살피고, 누군가는 그날의 뉴스를 훑어보고, 또 누군가는 드라마나 예능 또는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다시 보고있겠지. 평소라면 흔하디 흔한 풍경인데, 십년 전쯤으로 돌아온 오늘의 나에게는 새삼 그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이질적이게 다가왔다.
지하철에 앉아있는 동안 떠오르는 생각들은 챙겨온 노트에 적어두었다. 평소 잡생각이 많은 편이고 갑자기라도 무언가 떠오르면 바로 핸드폰을 꺼내 기록을 해두던 타입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으니 예비책으로 가져온 수첩에 메모해둬야지.
요거 몇 줄 적었다고 손이 후들후들 하군. 휴대폰 자판으로 적었다면 오분이면 다 쳤을텐데. 아무래도 자판이나 컴퓨터가 생겨나기 전, 손으로 글을 쓰던 시대의 작가들은 더 인정을 해줘야할 거 같다. 노벨문학상이 아니라 노벨노벨문학상이라도.
지하철을 타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폴라로이드 필름을 판매하는 잠실 홈플러스 지하에 위치한 사진관. 스마트폰 맵을 켜두고 찾아갈 수 없으니 집에서 미리 위치를 확인해두고 나왔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출구아래에 위치한 지도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홈플러스. 9번출구구나. 지도를 보고 출구 밖으로 나와서도 위치가 긴가민가해 지나가시는 어르신께 여쭤보니 간판이 보이는 곳까지 따라오셔서 안내를 해주셨다. 아이구 감사해라.
그러고보니 옛날에는 늘 이렇게 했었지. 지도를 보고, 길을 묻고, 가다가 헷갈리면 다시 한번 또 묻고. 네이버지도 혹은 구글맵이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여차저차 목적지를 향해 잘 찾아가곤 했었다. 낯선사람에게 길을 묻고 대답하면서 주고받게되는 짧은 대화, 그렇게 번거로우면서도 정겨운 것들이 점차 줄어든다는 게 왠지 아쉽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저 걸음을 옮겼다.
다시 지하철을 탔다. 어디로 향할까 고민을 하다가 홍대 연남동 근처의 경의선 숲길이 생각났다. 그곳의 푸르름이라면 조금 전 구매한 스무장에 만구천원 하는 폴라로이드 필름이 제 값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철은 덜커덩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달렸다. 당산역에서 합정역 사이. 열차가 한강 위를 달릴 때는 잠시 일어서서 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노래를 들으며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다른 어떤 것도 그 시간을 침범하지 않았다.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점점 더 자유롭고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갈아타기 위해 이동하던 사이에는 잠시 이런저런 생각이 끼어들기도 했다.
'ㅁㅁ는 요즘 어떻게 지내려나, ㅇㅇ이는 요번 연휴때 어디 가려나, 엄마는 시골에 잘 도착했으려나, 아참 오늘 코로나19의 신규 확진자는 몇명이나 되려나.'
이러한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이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핸드폰이 내 손에 있었다면 궁금증이 생긴 즉시 어떻게든 바로 그걸 해결하려고 했겠지. 지금 내게는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니 잠시 떠올랐던 생각들도 금세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나는 너무도 많은 생각, 생각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을 생각들에 파묻혀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중요한 것들은 머금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흘려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비어있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합정역에 도착했다.
길을 이리저리 다니며(헤메며) 거리를 눈에 담다가 한 카페로 들어왔다. 바닐라빈 라떼 한잔을 주문해둔 뒤 아까 구매한 폴라로이드 필름을 집어넣고 전원을 켜니 사진기에 불이 들어왔다. 고등학교 때 이후 만져본 기억이 없던 폴라로이드.
'첫 장은 버리는 장이었던 것 같은데'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버튼을 눌러보니 역시나 '버리는 장'인 검정색 필름이 먼저 한장 빠져나왔다. 아직 작동이 잘 되는구나. 반가웠다.
음료를 받아서 테이블에 올려두고, 옆 자리의 분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폴라로이드로 내 사진 한 장을 찍어드릴 것을 부탁하면서 세 분의 사진도 찍어서 한 장 드리겠다고 말을 하니 무척 좋아하시며 제안을 수락해주셨다.
내 사진 먼저 한 장, 그 분들의 사진도 한 장 찰칵. 필름을 드리고 내 자리로 돌아와 방금 찍은 사진이 선명해지기까지 기다렸다. 백지상태였던 필름에 내 모습이 조금식 드러났고, 동시에 세분이 계신 테이블 쪽에서도 "우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이런거 처음 찍어봐 진심"이라는 말과 함께. 다른 이의 하루 중에도 잠깐의 특별함을 만들어낸 듯 싶어 기분이 좋았다.
바닐라빈라떼를 한모금 마셨다. 달콤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지하철에서 적고 있던 것을 마저 노트에 기록하며 시간을 보내다 해 지기 전에 숲길에 가보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의선 숲길, 다른 말로 '연트럴파크'
완연한 봄이다. 소개울 양 옆길에 심어져있는 나무에 돋아난 연두색 잎사귀들도, 얇은 자켓 마저도 벗어볼까 고민하게 만들었던 공원을 향해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도, 사람들의 눈가에 가득한 웃음기도, 모두 완연한 봄이었다.
아무 자리에나 철푸덕 앉아 쉬면서 노래를 듣다가 옆자리에 계신 여자 두분께 사진을 찍어주실 수 있을지 또 한번 여쭤보았는데, 둘 중 한 분이 "아 그럼요. 저 사진 잘찍어요"라면서 덥썩 카메라를 받아주셨다.
찍사를 맡아주신 분은 내게 포즈와 표정까지 주문하며 연달아 여러장 찍어주셨고, 옆에 계시던 친구분께서는 "제 폰으로도 찍어도 돼요?"라고 물으시더니 사진찍히고 있는 내 모습을 옆자리에서 본인 핸드폰으로 찍어주셨다.
"와 사진 진짜 잘나왔다! 와 진짜 잘찍으시네요!"
"저희 사진 찍는거 완전 좋아해서 인천에서 사진찍으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이런저런 유쾌한 대화들을 몇마디 더 주고받다가, 사진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셔서 얼떨결에 번호교환까지하고, 폴라로이드 사진도 찍어드린 뒤 우리는 각자 걸음을 달리했다.
연트럴파크에서 살짝 빠져나와 골목 사잇길로 들어가니 아기자기 자그맣고 특색있는 가게들이 모여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멋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내 기분이 들떠 그리 보이는 것인지,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왠지 모를 '여행자'같은 설렘이 깃들여져 있는 듯 보였다.
우연히 발견한 '동진시장'이라는 간판. 내가 짱 좋아하는 이동진평론가님이 떠올라 무작정 들어가봤더니 작은 악세사리들과 캔들과 같은 소품을 판매하는 플리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옆에서 들리는 미야옹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엄청난 고양이소품샵이 있었다. 세상에나. 들어가보니 보는 것마다 심장이 아플정도로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품들(고양이 화투판, 책갈피, 접시, 스티커, 액정닦는손수건, 액자, 양말, 찻잔, 머그잔, 스푼 등)이 가득하게 들어서있었다.
발길이 떨어지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작은 소품 하나를 사고 겨우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드디어 마지막, 저녁식사시간이 왔다. 들어간 가게는 반층 아래에 위치한 <연남동 질리>라는 캐주얼 비스트로. 반쯤 보이는 창문 사이로 굉장히 열심히 요리하시는 두분의 뒷 모습이 보이는데, 그에 반해 안에 사람은 많지 않은 듯 보여 관심이 갔다.
셰프님께서 요리하시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바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대구튀김이 올라간 바질파스타와 멀롯 와인 한잔을 시켰다. 먼저 나온 와인을 홀짝이며 오늘 하루 내가 느낀 감정들의 흐름을 짚어보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인지하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도 잊어버렸을 정도로 어느 시점에선가부터는 나는 '내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완전히 자유롭게 다니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에 마음을 열어두고 나를 짓누르던 것들로부터 벗어나서는 순간 순간에 집중했고, 그 때 느끼는 감정들을 오롯이 내재화할 수 있었던 시간. 우연히 저질러버린 시도 치고는 너무도 좋은, 내게 딱 필요했던 감정을 얻어버렸다. 이 짓, 오늘 하루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갓 나온 바질파스타위에 대구살 튀김을 올려 한입에 삼킨 뒤, 그 여운을 와인으로 씻어내리다가 셰프님과 눈이 마주쳐 웃어보였다. 더 확실해졌다. 이 짓, 종종 하게생겼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