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 오전 7시 48분, 스위스 브리엔츠호수 앞 숙소에서
어제 같은 시간 루체른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일기를 쓰던 중 스카이다이빙을 앞둔 마음에 대해 막 이야기를 하려다가 기차가 역에 도착해 글이 끊겨버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이번에 ‘내 여행의 정수’로 삼아뒀던 스카이다이빙을 나는 하늘가까이 올라가 보지도 못한 상태로 포기해야만 했다. 만일 이것이 정말이지 ‘일기의 저주’ 따위였다면 오늘만큼은 어떻게든 지난날의 이야기들을 일기라는 형식을 통해 남겨봐야겠다. 이 작은 메모지에 적어놓는 몇 마디 주문이 오늘만큼은 반드시 효력을 발휘해 주기를 바란다.
내게 스위스에서의 시간이 그리 넉넉한 건 아니었지만 월요일 이날 하루만큼은 다른 일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23일 낮 12시로 예약해 둔 스카이다이빙을 할 수만 있다면 그 남은 시간은 내내 숙소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다 돌아가도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스카이다이빙을 제외 한 앞뒤 스케줄을 완전히 비워두고 하늘에서 뛰어내리기 위한 마음가짐 준비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의 시차적응 능력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했던 걸까. 여행 이틀차인 전날 늦은 아침까지 푹 잤던 것과 달리 삼일째인 이 날은 눈을 떠보니 새벽 4시였다. 더 잠을 청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금 뒤 스카이다이빙을 한다는 생각이 드니 약긴 긴장이 되고 또 이왕 눈을 뜬 김에 시간을 채워봐도 좋을 것 같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워를 하고 밖에 나오니 새벽 6시. 첫차를 타려 걸음을 서둘렀는데 하늘이 아직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해 문을 잠그는 데도 한참 동안 애를 먹었다.
노란색 151번 버스를 타고 20분쯤 지나 도착한 Brunig Hasilberg역에서 루체른행 열차를 기다렸다. 대합실 풍경은 마치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라는 시를 떠올리게 했다. 막차가 아닌 첫차라는 점이 다르다면 달랐겠지만, 창밖엔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고 몇은 졸고 몇은 쿨럭이면서 침묵 속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역이 어디든 나라가 어디든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분명 서로 일정 부분 닮아있는 면이 있나 보다.
한 시간 남짓 더 달려 열차는 루체른 역에 도착했다. 스위스에서의 일정이 워낙 짧아 눈 오는 지역에서만 내내 머무르다 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역 밖으로 나와 도시의 풍경을 보자마자 ‘내가 만일 이곳을 들르지 않았다면 나는 스위스의 단면만 엿보고 간 것이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착시간은 오전 8시 해가 이제 막 뜰랑말랑하면서 밤의 어둠을 물러내고 푸른빛으로 채우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든 유럽도시의 매력이 가장 극대화되는 시간대는 단연 일출과 일몰 무렵 일 것이다. 푸르스름한 하늘과 강위로 은은하게 반사되는 주황빛 조명은 사람의 마음을 부풀고 또 일렁이게 한다. 그것이 내가 스물여덟 무렵 처음 유럽여행을 온 뒤 그토록 오랫동안 여운에 빠져있던 이유일 것이다.
완전히 날이 밝아지기 전해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일출 시간을 단 5분 남겨두고 ‘카펠교’를 향해 달렸다. 8시 4분, 세이프! 로이스 강변을 연결하는 지붕이 덮인 나무다리. 위를 올려다보니 몇몇 지붕 안쪽에는 듬성듬성 회화 작품들이 걸려있었다.
다리 자체만으로 기대한 것만큼의 압도감을 주지는 못했지만, 다리 위로 올라가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딛다 보니 14세기에 지어져 700년 가까이 버텨온 이 다리 위를 그동안 지나다녔을 수많은 스위스 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토록 멋진 풍경조차 매일같이 스쳐 지나가다 보면 풍경이 지닌 아름다움에 한눈팔기 쉽지 않겠지만, 한낱 도시의 한량이 되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내게는 그 모든 풍경이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카펠교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니 루체른의 명소인 ‘빈사의 사자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스혁명 당시 부르본 왕가를 지키기 위해 파견돈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는 사자의 눈빛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는 듯했다. 별생각 없이 보러 온 돌로 된 조각상 하나가 생각보다 깊은 감동을 불러왔다.
하지만 이내 사자상을 보러 온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 단체관광객들이 마구 몰려오면서 엄숙했던 마음은 금세 휘발되어 버렸다. 인파를 비집고 나와 다시 루체른역으로. 스카이다이빙 집결지인 인터라켄 동역까지 한 번에 가는 열차가 있어 이에 올라탔다.
역에서 산 치즈프레즐을 뜯어먹으며 차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이제 슬슬 스카이다이빙을 한다는 게 실감이 났다. The Great Escape를 내내 들으며 나만의 긴장감을 유지했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하늘을 나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 레너드 스키너드의 Free Bird처럼 자유로운 새가 된듯한 기분일까? 나는 도대체 왜 꼭 스카이다이빙 이어야 했는지, 이번 여행에서 내가 그토록 얻고 싶었던, 혹은 털어버려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나를 그토록 가지 못했던 유럽땅을 향해 4년 만에 떠나게 했는지, 눈이 덮인 설산을 내려다보며 하늘을 날다 보면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간에 줄을 끊고 아무 데나 떨어지더라도 그 지점이 바로 내가 원하는 목적지, 내가 가야 할 길의 시작이 될 것 같았다. 비장한 마음을 품고 두 시간 동안 이동하니 드디어 집결지인 인터라켄 동역 Coop마트에 도착했다.
그. 런. 데. 맙. 소. 사. 이게 무슨 일이지?
집결지에 도착하고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나를 데리러 온다던 버스는 오지 않았고 혹시나 해서 열어본 이메일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있었다.
"Cancellation Skydive"
내용인즉슨 기상상황이 악화되어 당일 스카이다이빙이 취소됐다는 것이었다. 불과 10분 전에 도착한 이 이메일은 내 몸에 남아있던 일말의 힘을 쭉 빠지게 만들었다.
함께 뛰기로 했던 한국인 일행들은 “아...”라는 외마디 한숨을 내뱉으며 곧바로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나섰지만 나는 충격이 너무 커서 한 발짝도 뗼 수 없었다. 집결지인 마트 앞에 가만히 서서 한참을 멍 때리고 있었다. 안내메일에는 내가 원한다면 다음날로 연기할 수 있다고 적혀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변덕스러운 스위스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무산이 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바로 다음날 낮 12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 파리로 넘어가게끔 예약이 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혹시나 해서 곧바로 항공사에 연락해 봤지만, 비행시간을 늦추려면 비행기 티켓값이 맞먹는 30만 원을 추가수수료로 지불해야 시간 변경이 가능하다고 답변을 받았다. 아무리 내가 무모한 사람이어도 상식적으로 (사실 내가 그다지 상식적이진 않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일정이 망가진 뒤 융프라우라도 다녀올 까 싶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그 어느 것도 내키지 않았다. 본래 나는 여행 중에 어떤 좋거나 나쁜 변수들도 기꺼이 즐기는 타입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쉬움과 낙담이 크게 떨쳐지지 않았다.
‘그래. 눈 덮인 산도 겨울왕국처럼 이미 실컷 봤으니 이제 그냥 좀 쉬다가 파리로 넘어가지 뭐’ 하는 생각으로 그린델발트에 들러 눈밭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Der Laden라는 식료품 가게에 들렀다.
그래도 숙소 공간이 꽤 멋진 편이니 아늑한 오두막집 안에서 직접 퐁듀 요리를 해서 스위스산 와인과 함께 곁들인다면 속상한 마음을 조금은 달랠 수도 있겠지. 가게에서 퐁듀용 치즈와 야채, 빵, 버섯을 산 뒤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차창 밖으로 저물어가는 설원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이고 충전하는 법, 이걸 배우기 위해 내가 이곳에 날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브로콜리를 데치고 버섯을 굽고 퐁듀를 만들어 빵과 함께 곁들여먹었다. 맛은 예상했던 것보다 (의외로) 훨씬 기가 막혔다. 스위스산 피노누아 와인을 따서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다 보니 하루의 피로가 서서히 녹아들었다. 스르르 잠이 쏟아지려던 순간, 다음날 파리로 건너가야 하니 항공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비행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그,,, 런,, 데,,,?! 에에에 에ㅔ,,,?!!!!!!
본디 낮 12시 35분으로 잡혀있던 나의 비행시각이 아까 내가 항공사에 전화했을 때 요청했던 시간인 저녁 8시 45분으로 바뀌어있었다. 아까는 분명 30만 원의 추가요금을 내지 않으면 변경이 안된다 해서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잠이 확 깼다. 곧바로 스위스항공으로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리리- “헬로우”
시간이 이미 자정이었는데 항공사 직원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의 자초지종을 들은 뒤 잠시 확인해 보겠다더니 이미 아까 내가 요청한 대로 시간 변경이 완료됐고 추가요금은 안내도 아마 괜찮을 거 같다고 내게 전했다.
맙소사.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거 뭔가 찜찜한데? 직원에게 해당 내용을 증명해 줄 이메일 한통과 함께 비행시간이 갱신된 전자항공권을 다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여전히 찜찜한 구석은 남아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되는 데까지 해보고 싶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스카이다이빙 업체에 메일을 보냈다. 만일 가능하다면 내일 스카이다이빙을 지금이라도 예약해 달라고 요청을 넣었다.
그리고 24일인 오늘 아침. 이미 나는 숙소에서 퇴실하기 위해 모든 외출준비를 마쳤고 방 안에 앉아 와플을 구워먹으며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항공스케줄이 정말 문제없이 변경된 게 맞는지, 스카이다이빙이 오늘 가능하기는 할지 아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두어 시간가량은 기다려봐야만 한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단 하나도 알 수 없지만 나는 지금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모든 운을 끌어모아 써보고 싶은 마음이다. 과연 오늘 하루 내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오늘 밤 잠에 들기 전 나는 무엇을 떠올리며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선명해져 가는 나의 마음, 내가 원하는 것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혹은 얻어가야만 하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