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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네마 Feb 03. 2023

#8 파리는 비 올 때 가장 아름답다

1월 26일 목요일


파리 여행 이틀차. 전날보다 게으름을 조금 덜 피우고 일찍이 호텔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역시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 무작정 나왔는데 밖에는 보슬비가 살며시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구름이 뒤덮인 흐린 하늘을 초보여행자들이 본다면 크게 실망하고 말겠지만 나는 습기를 머금은 지금의 공기가 저녁 무렵 얼마나 멋진 풍경을 자아낼지 알고 있었다. 낭만의 도시 파리는 이런 날씨에서야말로 진가를 발휘한다.



오늘은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맛있는 브런치를 한 끼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유학시절 같은 어학원에 다니던 맛집전문가 친구에게 카페 추천을 부탁했고 마레지구의 season marais라는 곳을 추천받은 나는 식당에 가기 위해 나왔지만 그전에 먼저 Fnac이라는 상점에 들렀다. Fnac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교보문고 또는 핫트랙스와 같은 대형서점 겸 전자제품 매장 같은 느낌인데 이곳에 들른 것은 블루투스 키보드 한 대를 사가기 위함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틈틈이 계속 노트에 일기를 적고 있었는데 하루에 쓰는 양이 열 장 스무 장 남짓을 훌쩍 넘기다 보니 손목도 아프고 시간이 오래 걸려 현대 문물의 힘을 조금 빌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Fnac에 들어온 나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뜬금없는 곳에 한눈이 팔렸다. 한국에서도 2~3년 전부터 꾸준히 사모으고 있는 LP앨범 코너가 한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매달 정확히 두 장씩의 LP앨범을 사고 그에 대해 조사하면서 또 기록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평소 좋아하는 장르는 락이나 재즈풍 음악이긴 했지만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가리는 게 없는 나는 일렉트로닉이나 펑크류도 꽤 듣는다. 특히 프렌치 일렉트로니카 중에서는 이미 유명한 Daft Punk나 Disclosure 외에도 Breakbot과 같은 굉장히 훌륭한 뮤지션들의 이름이 아직 한국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Fnac의 음반 코너에 들어왔더니 한국에서는 아마존이나 디스코그스를 통해 중고품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너무나 탁월한 음반들이 새 제품으로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거 완전 노다지잖아..? 한참을 구경하고 이 음반 저 음반을 집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My Bloody Valentine의 음반을 골랐다. 시끄러운 소음과 몽환적인 멜로디가 섞인 슈게이징 장르의 아일랜드 락 밴드 My Bloody Valentine은 최근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귀가 터질 듯 큰 볼륨으로 듣던 음악이었다. 마침 지난달 아마존에서 구하려다가 중고제품마저 품절이 되어 사지 못했던 이 음반을 유럽에서 구하게 되다니, 우연히 들른 상점에서 굉장히 운이 좋은 발견이었다.


음반을 하나 고른 김에 책 코너로도 건너가서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두 권도 집었다. '발칙한 면이 없는 사람들은 매력이 없어'라는 신조를 갖고 있는 내게 사강은 그보다 더 매력적일 수 없는 인물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은 아무리 곱씹어도 지겹지 않은 너무나도 훌륭한 문장이다. 그의 소설들은 한국에서는 역시나 구하기 쉽지 않던 원서였는데 이제라도 떠올린 덕에 굉장한 보물들을 찾아냈다. 잔뜩 신이 났다. 블루투스 키보드와 바이닐 앨범 한 장, 책 두 권을 구매해서 밖으로 나왔다.


십 분 정도 걸어 도착한 카페에서는 고소한 팬케이크 냄새가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군침이 돌던 오리지널 팬케이크에 베이컨과 아보카도를 추가해서 카푸치노 한잔과 함께 주문했다.



머지않아 나온 애기엉덩이처럼 토실토실한 팬케이크. 시럽을 듬뿍 뿌려 한 입 썰어 먹었더니 달콤한 향이 입안 가득 사르르 퍼졌다. 부드러운 카푸치노를 한입 마셔 입 안에 남아있던 팬케이크를 넘겼다. 노곤노곤하고 여유로운 파리의 아침. 낮잠이라도 솔솔 쏟아질 것 같은 순간이었다.


오늘의 계획은 딱 두 개. 전날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눈 프랑스인 노부부 캐서린&브루노와 국립도서관을 가고 저녁에는 한국인 사진작가와 만나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발길이 닿는 대로 구석구석 걸어 다니며 비 내리는 파리를 있는 그대로 느낄 생각이었다.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BnF)의 입구에 도착하자 캐서린과 브루노 그리고 그들의 친구가 한 명 더 함께해 나를 맞아주었다. 전날 초록색 베레모를 썼던 캐서린은 오늘은 붉은색 베레모에 붉은색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장난꾸러기 브루노가 나를 환영하며 비주를 건네더니 우리 세 사람에게 본격적인 도서관 투어를 시켜주었다.

파리에는 Francois-Mitterrand, Richelieu-Louvois, Opéra, Arsenal, Jean-Vilar로 총 다섯 개의 국립 도서관이 있는데 2구에 있는 이곳 Richelieu-Louvois는 16세기에 지어져 궁전으로 이용되다가 현재는 도서관 겸 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브루노가 앞장서며 회화와 장신구 등 각종 수집품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나는 그 뒤를 아기새처럼 쫓아다니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네 사람은 관람을 마치고 나와 인근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브루노는 개구진 표정으로 전날 내가 슬쩍 언급하기만 했던 저녁 동행 파트너가 어땠는지부터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푸핫”하는 느낌으로 그럼 자신의 아들을 만나보라고 농담을 던졌다. 오늘 저녁 사진작가인 또 다른 남성과 저녁식사를 한다는 얘기를 하면 너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적당히 샴페인을 나눠 마신 뒤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는 4년 전 파리에서 특식이 먹고 싶을 때마다 찾아갔던 스페인 요리 전문점 “Casa san pablo"라는 곳에서 하기로 했다. 본래 캐주얼한 카페에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와인이나 한두 잔 기울이려 했지만 갑자기 이 가게가 떠올랐다.


파리에 있던 동안 최소 열 번 이상은 다녀갔던 이 가게에서 늘 맛보았던 스페인식 오리가슴살스테이크가 오랜만에 생각이 나 내가 먼저 제안했고 그는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그와 나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채 연락만 주고받다 오늘에서야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10분 정도 먼저 도착해 홀로 추억을 회상하며 메뉴판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4년 전에 항상 먹었던 'Magret de canard au miel(오리가슴살스테이크)'가 보이지 않았다. 메뉴판에는 정통 스페인 요리들과 타파스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럴 수가. 직원에게 물었더니 그는 내가 기억하는 메뉴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고, 내가 4년 전에 먹던 메뉴라고 설명하니 이제 퓨전요리는 하지 않고 정통 스페인 요리들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 나는 문자로 상황을 설명했고 그는 괜찮다며 스페인 요리를 함께 먹자고 했다.


곧이어 그가 도착했다. 위아래로 검은 옷을 입고 성큼성큼 들어오는 그는 여자치고 키가 큰 편인 170cm인 내가 보아도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와 덩치가 매우 컸다. 하지만 그보다 내 시선을 더 강하게 사로잡는 것은 그의 부스스한 긴 머리였다. 주변에 장발인 남자가 없어 그의 행색을 보고 다소 놀란 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해 대놓고 입을 쩍 벌렸고 그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프랑스에서의 경험이 나보다 훨씬 많은 만큼 프랑스어가 매우 유창했기에 나는 그에게 메뉴 선택권을 맡겼다. 메뉴판을 들고 꼼꼼히 살펴보는 그를 맞은편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계속 보다 보니 머리가 멋지네요”라고 말을 던졌다. 그가 “아까 저 보고 놀라던데요"라고 묻자 나는 “처음엔 그랬는데 보다 보니 멋져요”라고 대답했다.


딱 봐도 키와 덩치가 커서 산적처럼 잘 먹을 것 같은 인상이긴 했지만 실제로도 식사량이 많다길래 우리는 메인 메뉴와 타파스를 섞어 넘치도록 푸짐한 식사를 주문했다.


포토그래퍼라는 사실만 알고 만나 내 사진을 한두 장 멋지게 찍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상상한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또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멋진 사람이었다.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대학을 나온 뒤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사진사로 일하면서 그 외 다양한 사업을 병행한 사람이었다. 20대 초중반에는 혼자 파리로 훌쩍 날아와 한인민박을 크게 운영했고 10년 동안 파리에서 살면서 사업을 이어왔지만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쯤 집들을 정리하고 지금은 강원도 영월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티백 제조에도 관심이 생겨 티 소믈리에 과정을 요즘 밟고 있다고도 했다.


휘날리던 머리칼만큼이나 자유로운 생활을 해온 그는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던 사람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지금까지 살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일단 스스로도 주변에 비해서는 굉장히 좀 튀는 구석이 있고 지금껏 나름의 자유로운 선택을 해왔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는 결국 나 또한 비슷한 바운더리의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 있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때론 무모한 일들을 저지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정신을 번뜩 차리며 다시 돌아와 버리는 갈팡질팡하는 류의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거침없이 나아가온 사람이었다. 물론 확신에 가득 차 보이는 그 역시 스스로를 괴롭히는 막연한 불안과 괴로움이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많은 영감을 가져다주는 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사람이었다.


나와 그 사이의 대화는 끊김이 없이 술술 흘러갔다. 대화를 하다 보니 그 역시 내게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한인민박을 운영하던 시절 직접 여행가이드로 투어도 진행하면서 정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덕에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조금만 얘기를 나눠봐도 성향을 파악하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나는 감조차도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보통 누군가가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에 대해 다소 떨떠름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의 말들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진진했다.

내가 글을 쓴다는 말을 하자 그는 "아 어쩐지...!"라고 외마디 감탄을 내뱉으며 "글 쓰시는 분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자기만의 방이 있더라고요. 만나기 전 메시지 주고받을 때부터 그 공간감이 느껴졌어요"라고 덧붙였다.


전날 만났던 동행과 대화의 소재는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그 결은 완전히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리를 한번 더 옮겨 얘기를 이어갔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한 시를 훌쩍 넘었다. 중간에 주방장이 컵을 깨뜨리면서 파편이 내게 튀는 등 이런저런 소동이 있었지만 그런 일련의 사건들은 영화 속에서 2배속으로 빨리 감기 되는 장면처럼 그저 휙휙 지나갈 뿐이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가게 안에는 우리 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내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우리는 가게에서 나눠준 사탕을 하나씩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함께 조금 더 길을 걸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꼭 이성적인 호감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사람의 결이 맞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보영 씨 만나면 좋을 것 같긴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네요"


걸음을 멈춰 그를 바라봤다. 그의 등뒤로 쏟아지는 노란색 가로등 조명이 낭만을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의 만남 역시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함께있던 내내 담백했던 그였지만 이만 각자 들어가자는 내 말에는 아쉬움을 삼키기 어려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대신 한국 가서 꼭 봐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대답 대신 무언의 미소만을 남겼다.


택시 뒷자리에 앉아 노래를 듣다가 창문을 내리고 밖을 바라봤다. 파리의 밤은 촉촉히 젖어 희미한 빛을 흩뿌렸고 비에 젖은 흙과 풀냄새가 마음을 적당히 간지렀다. 역시 파리는 비 오는 날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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