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한 동일시란 그런 의미다. 적어도 나는 물리적인 폭력은 가하지 않았으니 저 남자보단 낫다며 경계 짓고 우열을 구분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련의 태도가 내게도 잠재해 있다는 걸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미투(#Metoo)’란 이런 것이다.” 2019년 3월 31일, <미투의 정치학>이란 책을 읽고 쓴 문장이다.
침묵은 곧 동조란 말이 있다. 문장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는 침묵이란 행위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입장이다. 무수히 많은 말들이 서로 충돌해 증발하거나, 어떤 말이 금세 다른 말을 과거의 타임라인으로 퇴적시키는 시대에 ‘굳이 나까지?’란 생각은 있으니까. 부질없고 의미 없는 내 말 하나 전시하는 거보다, 좀 더 주목받고 오래 머물러야 할 누군가의 피드가 있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한때 난 어떤 문제에 대한 선명하고 뚜렷한 입장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넌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물으면 그에 대한 답이 술술 쏟아질 수 있도록. 어떠한 논제 앞에서도 ‘나만의 고유한’ 논증의 다발을 장전해둬야 하는 언론사 시험처럼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어떤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선 필요한 정보를 가공하고 성찰할 시간이란 게 어느 정도 전제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게.
반드시 무언갈 알아야만 발화의 권리를 획득하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떠한 성찰 없이 그저 재생산되고 짜깁기된 입장들을 답습하는 게 침묵의 반대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입을 열기보단 귀를 여는 데 더 몰두해왔다. 그게 도리어 입을 여는 시간을 미뤘던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나는 떳떳한 입장과 친한 사이가 아니다. 구조가 공고해지는 데에 개개인이 어느 정도 기여한단 전제를 하면, 나 또한 거기에 상당 지분을 가진단 점은 부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제보다 더 나아진다는 게 지난날의 과오가 과오인 걸 깨닫고 반복하지 않으려는 거라면.
최근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그리고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말을 보며 나도 뭔갈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작년의 나보다 크게 나아진 게 없다. 더 나아질 게 없어 보이는 요즘 세상처럼. 그래서 작년의 문장을 변주했다.
적어도 난 ‘그 방’에 들어간 적이 없으니 26만 명의 사람과 다르다며 안주하거나, ‘그 방’은 극단적인 사례라 말하며 각자의 SNS에 개설된 ‘단톡방’과 구분 짓는 게 아니라, 평소 웃자고 공유한 이미지와 농담들 속에도 ‘그 방’의 무언가와 닮은 게 있다는 걸 인정하고 돌아보는 것이 2020년 3월 22일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일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