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존재에게는 희망이 있다. 어린이에게 다가올 내일을 벽돌 한 개로 치환한다면 금세 큰 창고를 채우고도 남을 거다. 내일이란 본디 불투명하여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평균 기대수명에 입각해본다면 그렇다. 어린이는 신이 저마다 창고에 각자 몫으로 예치해 둔 벽돌을 매일 하나씩 꺼내 기초를 쌓는다. 설계도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기초 공사 동안에는 어떤 모양이라도 만들어 볼 수 있고 어떤 높이든지 쌓아보는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유독 아이가 영특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이 녀석이 내가 몰라봐서 그렇지 사실은 영재가 아닐까 혹은 장차 기대보다 큰 인물이 되려나 하는 상상이 그 시뮬레이션 중 하나다. 타인이 선심 쓰듯 던진 작은 칭찬 하나에 어쩌면 우리 아이가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건 아닐까 싶다가도 또 다른 타인이 선심 쓰듯 던진 작은 조언 하나에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뒤처진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양극의 조바심이 든다. 이는 모두 내일이 존재한다는 전제와 그로부터 보장되는 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건 비교 대상 여부다.
얼마 전 네 살 난 둘째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 부모 상담 기간이었다. 네 살 난 생명에게 그저 바랄 것은 잘 먹고 잘 자고 공동체 안에서 안전하게 또 더불어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것뿐이다. 그런 아이들 대상으로 무슨 상담이 필요할까 싶다마는 국어, 영어, 수학 따위 말고 배변훈련이라든지 사회화라던지 그 나이에 배워야 할 과업이 있으므로 부모 눈에 보이지 않는 일상을 매일 목격하는 선생님과 대화가 꼭 필요하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께서 또래 중에 우리 아이가 가위질을 가장 잘한다고 칭찬하셨다. 그냥 막 자르는 게 아니라 정한 바 목표에 따라 그림 테두리를 따라 자르는 능력이 있단다. 또한 받아들이는 게 빠르고 말을 가장 조리 있게 잘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발음이 제일 좋지 않아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이런 게 바로 양극의 조바심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칭찬할 게 없어 가위질을 칭찬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만 세 살 아이들에게는 가위질이 소근육 발달 지표가 될 수도 있다. 가위질을 그렇게 잘하고 말을 조리 있게 잘한다니 우리 아이는 어쩌면 내 생각보다 좀 더 똑똑한 건 아닐까. 상상 속에서 둘째 아이의 건물이 순식간에 80층 높이로 화려하게 지어진다. 이 아이는 천재다.
아니지, 발음이 그렇게 안 좋다니 아직 어려서 그런 모양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일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대에 자란 아이들은 마스크 때문에 입 모양을 못 보고 대화하느라 발음이 부정확하다던데 우리 아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발음이 안 좋다니 이건 분명 문제가 있다. 요즘 많이 보낸다는 언어치료라도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닌가. 80층짜리 상상 속 건물이 와르르 무너진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이를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가져다 열심히 가위로 자르는 중이었다. 기특한 내 새끼. 5분쯤 지났을까 큰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큰 일 났다는 듯 외친다.
"엄마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동생이 잘랐어요!" 이것저것 자르다 결국 엄마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표지마저 자르고 마는 기특한 내 새끼. 가위질은 똑똑한 거랑 아무 상관이 없다. 단전에서부터 기를 끌어올려 아이에게 버럭 소리치고야 말았다.
아이가 잘라버린 책 제목이 나를 보고 웃는 거 같았다. 곧이어 이 소재로 글이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나오며 모든게 괜찮아졌다. 제목이 또 나를 보고 웃었다.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